선거 중인 옛 소련 위성 국가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되는 게 아니냐는 국민 공포를 자극하는 러시아의 공작 탓이다. 대선 결선투표를 앞둔 몰도바에 이어 이번에는 총선을 치러야 하는 조지아 차례다.
21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이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러시아 정보부는 지난 수년간 조지아 재무부·외무부·중앙은행, 에너지·통신기업 등에 해킹을 통해 깊숙이 침투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는 "러시아는 조지아 정부가 원치 않는 행보를 보일 경우 전력·통신 등 인프라망을 손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라고 평가했다.
러시아 총정찰국(GRU) 등의 해킹에는 조지아 주요 언론과 선거관리위원회도 당했다고 한다. 이런 대규모 공작은 오는 26일 "유럽으로서의 미래와 러시아로서의 과거 중 하나를 선택하는"(살로메 주라비슈빌리 조지아 대통령) 총선을 코앞에 두고 등장했다.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하려는 이유는 역시 지정학적 중요성에 있다.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특히 서방의 제재로 조지아를 비롯한 코카서스지역은 러시아에 핵심 교역망으로 급부상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소련 붕괴 뒤로 직접 국경을 맞댄 양국은 '앙숙'이었다. 2003년 '장미 혁명'을 통해 친러 정권을 몰아낸 조지아는 5년 뒤 러시아의 침공에 항복, 압하지야·남오세티야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다. 그러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조지아는 몰도바 등과 함께 유럽연합(EU) 가입을 신청했다.
기류가 바뀐 건 집권당 '조지아의 꿈'이 권위주의 노선으로 서방과 갈등을 빚으면서다. 친(親)러 재벌이 창당한 집권당은 지난 5월 대규모 반대 시위에도 언론·시민단체를 통제하기 위한 러시아식 '외국 대리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도 거부했다. 결국 EU는 회원국 가입 절차를 전면 중단했다.
집권당은 공식적으로는 친러·반서방이 아닌, '관계 재설정'을 표방한다. 다만 과거 서방과 밀착해 러시아와 심각한 갈등을 빚은 결과가 '남오세티야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과도한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불러왔다는 러시아 측 논리와 같다. EU·나토 가입을 전반적으로 지지하지만, 러시아와의 갈등은 피하자는 게 실제 조지아 여론이라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조지아의 꿈'은 향후 총선에서 승리하면 친서방 성향인 주라비슈빌리 대통령 탄핵까지 벼르고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회 150석 중 3분의 2(100석) 이상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다. 현재 집권당은 90석을 갖고 있다.
비슷한 구도의 대결은 지난 20일 몰도바 대선에서도 확인됐다. 개표 결과 친서방 마이아 산두 현 대통령은 1위를 기록했지만, 과반 달성에 실패해 친러 성향인 2위 후보와 결선투표에서 다시 맞붙게 됐다. 동시에 치러진 EU 가입 국민투표에선 당초 무난한 통과 예상과 달리 찬성표가 51.2%로 과반에 턱걸이했다.
러시아 개입설은 여기에도 등장했다. 몰도바 수사당국은 이달 초 러시아를 배후에 둔 단체가 몰도바 국민 13만여 명에게 EU 가입 반대 투표를 종용하면서 금품을 뿌렸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