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멸시당한 자이니치와 파독 간호사들에게 드라마 '파친코'는 이래서 특별했다

입력
2024.10.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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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파친코' 속 한일관계와 '21세기 선자들'

[인터뷰] '파친코' 6~8회 연출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



"바보였어요,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선자)

"남은 인생을 과거에 얽매어 살아야 하나요?"(가토)

미국 드라마 '파친코' 시즌2에서 선자(윤여정)는 노년에 어렵게 우정을 쌓은 일본인 친구 가토(구니무라 준)와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두고 이렇게 의견이 엇갈린다. 시대적 배경은 1989년. 선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이고, 가토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가토를 바라보며 순자는 10초 넘게 침묵하다 결국 작별을 고한다. 한국인의 역사적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100년 지나도 개선되지 않은 문제"

"원작 소설엔 없는 내용예요. 1945년 해방 후 한국과 일본이 100년 동안 겪고 있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거사 문제, 즉 일본의 진정한 사과 문제를 상징적으로 담았죠." 이 장면이 포함된 '파친코' 시즌2 마지막 세 편 6~8화를 연출한 재일교포 이상일(50) 감독은 최근 한국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윤여정, 구니무라 준 두 분이 정말 집중해서 찍어 줬다"며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파친코' 시리즈는 미국 기업 애플 산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플러스가 1,000억 원을 들여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국 여성 선자네 가족을 중심으로 이민사를 다뤘다. 이창래 작가와 수 휴 총괄 프로듀서 등 여러 한국계 미국인들이 대본 작업에 참여했다.


"취업도 안 됐는데... 혈육 아픔 대변 보람"

전후 일본에서 가난과 차별을 견디고 버틴 선자 가족의 굴곡진 삶의 여정을 담은 '파친코' 시리즈 작업은 이 감독에게 특별했다. 그는 "한국인 자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내게 운명 같은 작품"이라며 "이 작품을 통해 내 뿌리를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최종회가 공개된 '파친코' 시즌2에서 선자는 일본 빵집에서 "우리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데 가라. 당신(자이니치·재일 한국인) 같은 사람들이 가는 가게 있잖나"라고 멸시받는다. "제 아버지와 할머니 세대 때 차별이 심했죠. 자이니치는 일본에서 취업이 잘 안 됐거든요. 참정권이 없어 선거에도 참여하지 못했고요. 제 혈육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작업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 감독의 말이다.

이 감독이 연출한 분량엔 한국의 정서가 곳곳에 배어 있다. 민요 '한오백년'이 절절하게 흐르고, 선자는 큰아들 노아(강태주)가 일본 대학에 합격하자 머릿고기와 녹두전 등을 내놓고 잔치를 벌인다. "대본엔 공원 인근에 광장 같은 세트를 만들어 잔치를 하는 설정이었는데 선자가 사는 집 골목으로 바꿨어요. 제 할머니가 머릿고기를 만들어 잔치를 하신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드라마 촬영은 한겨울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캐나다에서 주로 진행됐다. "촬영 환경이 (일본과) 너무 달라서" 힘들어하던 그에게 버팀목이 돼 준 건 한국 배우들이었다.



여성 연대로 역사 폭거 버티고 비극적 삶 개척

'파친코' 시리즈가 그린 1910~1980년대 일본과 미국 등으로 건너간 선자네 가족 4대에 걸친 삶의 분투는 세계 이민 사회의 공감을 샀다.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역사물에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도 파격이었다. 2022년 공개된 시즌1에선 일제강점기 선자 모녀를 통해 조선 땅의 소중함을 부각했고, 시즌2에선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와 그의 형님 경희(정은채)를 통해 생존의 숭고함을 보여줬다. 역사의 폭거를 여성 연대로 버티고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비극적 삶을 개척하는 게 이 드라마의 특징. '파친코' 시리즈가 "국경을 초월해 시청자들에게 세계적이고 진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며 미국 방송계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보디상'(2023)을 받은 배경이다. 선자의 주체성은 "연기 경력이 50년을 넘었더라도 출연하려면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말에 섭외 제안을 거절하려 했던 윤여정의 마음도 돌려놨다. 그는 "선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이지만 위엄과 자존감이 있다"며 "그 '끼끗함'을 내가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네 나라로 돌아가" '21세기 선자들'의 공포

'파친코' 시리즈의 나비효과는 독일로도 번졌다. 책 '파친코와 정동의 미디어-OTT는 세상을 어떻게 그리는가'(2024)를 보면, 1960~1970년대 한국에서 독일로 파견된 이주 간호사들은 선자의 삶에 몰입했다. 독일 이민 여성이자 독립연구자인 저자 정순영은 "타국에서 주체적 의지로 난관을 돌파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파친코'의 선자와 재독 이주 간호사들은 닮았다"고 썼다. 이민자의 설움은 독일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올 초 독일 극우 정당이 이민자를 대거 추방하려는 계획을 논의한 정황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21세기 선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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