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페리(Anne Perry, 1938.10.28~ 2023.4.10)는 영국 스릴러 작가다. 앤솔러지에 묶인 단편을 빼면 한국어로 번역된 건 없지만, 그는 1998년 더 타임스 선정 ‘20세기 범죄소설 100대 거장’에 이름을 올렸고 2000년 에드거-최우수 단편소설상을 수상하는 등 영미권에서 꽤 주목받았다.
그는 작품 못지않게 ‘살인의 추억’으로도 유명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영화감독 피터 잭슨이 97년 개봉한 영화 ‘헤븐리 크리처스(Heavenly Creatures)’의 모티브가 된 ‘파커-흄(Parker-Hulme) 살인사건’의 공범 흄이 그였다.
저명 물리학자의 장녀로 런던에서 태어난 그(본명 Juliet M. Hulme)는 어려서 결핵을 앓아 8세 무렵부터 기후가 따듯한 중미 바하마 등지의 양육 가정에서 성장, 13세 무렵 아버지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캔터베리대 총장이 되면서 그도 함께 정착했다. 고교 재학 중 그는 한 살 위인 폴린 파커(Pauline Parker)와 만났다. 둘은 동성애 관계란 의심을 받을 만큼 붙어 지내며 자신들만의 문학적 판타지 세계를 구축해갔다. 54년 페리(당시 흄)의 부모가 별거하게 되면서 그는 남아공 친척 집에 맡겨졌다. 저소득 노동자 계층 출신이던 파커의 부모는 페리와 함께 남아공으로 떠나려던 딸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은 54년 6월 스타킹에 벽돌을 넣어 만든 흉기로 파커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는 5년형을 살고 출소한 뒤 영국에서 계부의 성을 받아 개명했다. 79년 소설로 데뷔,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던 중 피터 잭슨의 영화가 개봉되면서 범죄 전과가 알려졌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2009년 다큐멘터리 ‘Interiors’에서 그는 “(누구나 그렇듯) 나는 선한 일도 했고 나쁜 짓도 저질렀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