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포드가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고 미국 부통령-대통령이 된 반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는 평생 투표 한번 안 해보고 대통령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 만 20세에 미 육사에 입학해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군인인 그는 2차대전 전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2년, 출마를 포기한 해리 트루먼(공화) 대통령의 러브콜을 받고 대선에 도전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급서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48년 선거에서 어렵사리 승리하긴 했지만 그리 인기 있는 대통령은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돈을 퍼붓는 것도 못마땅해했고 특히 50년 한국전쟁 발발과 교착상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그를 불신했다. 52년 대선 공화당 유력 후보는 마셜플랜에 반대하고 나토 결성도 못마땅해하던 보수파 불개입주의자 로버트 태프트였다.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는 태프트를 저지할 트루먼의 히든카드였다.
대선 후보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조기 종식을 공약하며 현역 대통령인 트루먼의 무능을 간접적으로 부각했고,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뒤에도 민주당 후보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외면하다시피 하며 트루먼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K1C2 전략, 즉 한국전쟁(Korean War) 조기 종식과 공산주의(Communism) 봉쇄, 트루먼 정부의 부패(Corruption)와 무능(incompetence)에 대한 공격이었다. 트루먼은 여러 차례 그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52년 10월 24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그는 “열 일 제쳐두고 우선 한국전쟁을 끝내는 데 집중하겠다”며 “당선되자마자 전장을 방문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선이 유력시되던 대선 후보의 파격적인 발언에 트루먼조차 정치적 허언이라며 비판했지만 전장에 남편과 자식을 보낸 유권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39개 주에서 승리했고, 얼마 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