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금손’은 사라질까

입력
2024.10.24 16:00
26면
AI가 몰고 올 연구현장 변화
칸막이 넘어 스타 발굴 기대
비효율 걷어낼 기회 될 수도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레시피는 같아도 요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진다. 몇 번을 해봐도 어머니 손맛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의외로, 과학 실험도 그렇다. 누가 피펫을 잡느냐, 누가 무게를 재느냐에 따라 결과에 차이가 생긴다. 연구자들은 그래서 실험도 손을 탄다고들 한다. ‘요리 금손’처럼 알게 모르게 ‘실험 금손’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재료를 써도 누가 요리하느냐에 따라 다른 상이 차려진다. 재료만 봐선 예상 못 했던 색다른 음식이 나오기도 한다. 사람들이 유명 레스토랑을 찾고, 스타 셰프를 동경하는 이유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같은 현상, 같은 데이터가 주어져도 누가 어떻게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방향이나 결과에 차이가 생긴다. 요리 대결에서 젊은 셰프가 어머니뻘 주방장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젊은 과학자도 아버지뻘 교수보다 뛰어난 논문을 낼 수 있다.

연구자들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인공지능(AI)이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다. 피펫 대신 마우스를 잡고, 실험 대신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연구실이 늘고 있다. 연구 현장에 정보화 바람이 분 건 오래전부터였지만, AI가 몰고 오는 바람은 속도와 세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파급력이 클 거란 예상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기반이 됐던 1990년대 생물정보학이 단백질 정보를 빠르게 찾아주거나 분석하는 데 머물렀다면, 올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구글 딥마인드의 AI ‘알파폴드2’는 단백질의 구조뿐 아니라 다른 물질과의 상호작용까지 예측한다.

개별 연구실의 변화가 확산될수록 연구 현장의 문화나 과학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과학자들은 연구개발(R&D)이 실질 성과로 이어지려면 충분한 예산을 꾸준히 지원하면서도 부담 주지 말고 실패도 인정해주며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해왔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로부터 한국의 R&D 성과는 투자 비용 대비 놀라울 정도로 낮다는 평가를 받은 걸 보면 분명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동안 과학은 전문지식과 손기술로 무장한 이과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AI의 영향으로 첨단 과학기술 지식의 문턱이 낮아지고, 미국과 일본에선 스스로 실험하고 논문도 쓰는 ‘AI 과학자’까지 등장한 마당에 이과냐 문과냐를 굳이 가를 이유가 없다. 분야를 가로막고 있는 칸막이를 넘나드는 폭넓은 사고법이 AI와 만나면 지금까지 없던 아이디어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실에서 ‘AI 금손’이 실험 금손 못지않게 인정받고, 남다른 접근법으로 창의적 결과를 내 스타 셰프 같은 인기를 누릴지 모른다.

기초와 응용, 학문과 산업의 경계도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은 둘 다 AI 관련 업적에 주어졌고, 수상자 5명 가운데 3명은 미국 빅테크 구글 출신이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실험하고 관찰하며 기초과학에 수십 년 몸담아온 연구자들이 대부분 가져갔던 노벨과학상이 응용과학에, 그리고 기업인에게 돌아간 건 파격적이다. 더 이상 과학이 논문 속에만, 실험실 안에만 머물지 않을 거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유명 요리사들의 수천 가지 동작을 AI로 분석해 조리 기술을 구현했다는 로보틱 웍과 한 유명 중식 셰프의 대결이 다음 달 공개된다고 한다. AI를 만난 조리업계의 변화에 대중의 관심이 높다. 우리 과학계는 AI가 몰고 올 변화에 얼마나 준비돼 있나. 현실에 안주해온 일부 연구자들은 위기를 맞을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비효율이 걷히면 다행이다. 국민들은 이미 오래 기다렸다.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