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문헌일(71) 서울 구로구청장(국민의힘)이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고 전날 구청장직에서 사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 30대 구로구 주민의 반응이다. 직무 수행 도중 물러나는 이유가 자신이 운영해 온 회사 주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그는 "결국 자기 재산 지키겠다고 자리를 내팽개친 사람에게 구민들 삶이 안중에나 있었겠냐"고 혀를 찼다.
지난 2022년 6·1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문 구청장이 취임 후 2년 3개월 만에 자신이 보유한 170억 원대 주식의 백지신탁을 피하기 위해 돌연 사퇴하자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스스로 구정 공백 사태를 만든 데 이어 공직자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위해 도입된 백지신탁제의 취지마저 훼손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소속으로 구로구청장에 당선된 것은 12년 만이었다.
앞서 지난해 3월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는 문 구청장이 보유한 주식이 직무 관련성이 있다고 보고 해당 주식을 팔거나 백지신탁하라고 요구했다. 백지신탁제는 고위공직자 본인과 가족이 직무와 연관성이 있는 주식 3,000만 원 이상을 보유한 경우 직접 매각하거나 금융기관에 백지신탁하게 하는 제도다. 문 구청장은 1990년 구로구에 설립한 정보통신기술(ICT) 엔지니어링 업체인 '문엔지니어링'의 주식 4만8,000주(170억 원 규모)를 갖고 있다.
문 구청장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모두 패소했다. 결국 문 구청장은 전날 구로구의회 의장에게 사임통지서를 제출했고, 구로구는 내년 4월 보궐선거 때까지 엄의식 부구청장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문 구청장의 결정 때문에 구청장 공백사태는 물론 보궐선거에만 20억~30억 원대의 추가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공직자들이 백지신탁을 거부하고 언제든 공익 대신 사익을 택할 가능성은 잠재돼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주식백지신탁심사위 심사 결과에 불복해 행정심판을 제기한 건수(지난해 3월 기준)는 총 8건이다. 이 중 4건은 각하 또는 기각됐다. 고위공직자들이 불복 절차를 '시간 끌기' 수단으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제기해 시간을 끈 뒤 임기를 마무리해버리는 것이다. 2014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인사혁신처가 공직자 직무관련성 심사를 한 5,073건 중 899건(17%)은 직무관련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 중 11명(1.2%)은 결과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 이 가운데 5명은 소송 진행 중 임기를 마쳤다.
경실련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인사혁신처의 판단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고 시간을 끌다가 사익을 선택한 그의 결정은 공직자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며 "재직 중 받은 급여는 반환하고, 주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