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찔리는' 듯한 한강의 문체...고통을 펼친 당신, 누리시기를" [노벨문학상 기고]

입력
2024.10.17 04:30
20면
김형중 문학평론가·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강의 시적 문체는 고통을 '읽게' 하지 않는다
문장에  '찔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사태...
트라우마 앞에 선 문학의 딜레마이자 책무

심리적 접근금지의 영역으로 한강은 간다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고통스럽게, 천천히"

화제작 '소년이 온다' 얘기부터 해보자.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트라우마 앞에서 작가들은 두 갈래 길 앞에 놓인다. 알리기와 느끼게 하기. 전자의 정점에 임철우의 '봄날'이 있고, 후자의 정점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있다. 형용사형 글쓰기라고나 할까? '소년이 온다'는 독자가 5‧18의 전말을 '알게' 하지는 않는다. 대신 '느끼게' 한다. 그 느낌은 '고통'이다.

에필로그 포함 일곱 명의 화자가 등장해, 번갈아 가며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생존자도 있고, 유령도 있고, 작가 자신도 있다. 마치 돌림노래와 흡사한 구성인데, 원리상 이 악곡 형식에 끝은 없다. 부르던 이가 떠나도 그 자리에 누군가 들어서면 노래는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는 것은 그들 중 하나의 자격으로 긴 노래에 동참하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한강 특유의 시적인 문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어느 순간 독자는 화자들의 고통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문장에 의해 '찔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자신의 통각을 온전히 열어두지 않고서야 읽는 이들의 통각을 자극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다른 화제작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에 대한 답이다. 고통은 타인에게 전달되기 전에 먼저 작가를 덮친다. 트라우마란 그리로 다가가는 일 자체가 엄청난 감정 소모를 요구하므로 심리적으로 '접근금지'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한강은 그리로 간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험난함과 두려움과 슬픔을 모두 겪어내면서, 하나하나 기록하면서 간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기보다는 '4‧3에 도달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소설이다. 정확히는 거기 도달하려는 자의 사투를 다룬 작품이다.

'트라우마'란 말을 어렵고 복잡하게 정의할 필요는 없다. 문학과 관련해 트라우마는 '말로 할 수 없는 영역'을 지칭한다. 문제는 문학이 '말'을 다루는 작업이란 점인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사태, 그것이 트라우마 앞에 선 문학의 딜레마이자 책무다. 그래서 종종 트라우마는 회피와 투사와 망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한강은 그 모두를 거절한다. 그의 작품들은 고통 앞에서 피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얕잡아 보지도 않으면서, 앓을 것은 다 앓고 내놓을 것은 다 내놓으면서, 고통스럽게 천천히 전진하는 것이 그의 문장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평 중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란 표현은 정곡을 짚었다. 노벨문학상의 제법 오래된 기준은 '특수와 보편'이었고, 한강이야말로 한국사의 '특수'한 국가폭력 트라우마를 문학의 '보편적' 역량으로 감당해낸 작가다. 저 구절은 그렇게 읽힌다. 저와 같은 심사평의 영향 때문일까? 독자들은 위에 거론한 두 작품과 이미 유명해진 '채식주의자' 이렇게 세 작품에 주로 열광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강의 문학은 유수의 상을 받기 오래전, 1993년(시)과 1994년(소설)에 시작되었다. 저 세 작품의 그늘에 가려 그의 초기작들이 상대적으로 빛을 못 보는 일은 안타깝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지금보다 더 풋풋하고 젊은 날의 한강을 만날 수 있다. 그때부터 그는 타인의 고통에 민감했고 상처 난 내면을 버리는 법을 몰랐다. '내 여자의 열매'에 실린 표제작은 이후 '채식주의자'로 자라게 될 일종의 씨앗이기도 하다. 그리고 '희랍어 시간', '노랑무늬영원', '흰', '바람이 분다, 가라', 그의 시집, 음악…. 그러나 허락된 지면상 긴 얘기는 미룬다.

다만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한강의 업적이 단순히 한강 개인의 영예만이 아니란 점은 강조해두어야겠다. 혹자는 노벨문학상을 유럽의 '보편문학'이 그 기준에 따라 증여하는 '인준서'라고도 하고, 세계문학공화국의 '국제환전소'라고도 한다. 일견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럽의 '보편문학'의 기준에 전복과 도약을 요청하고 도전하는 것도 바로 인준받은 주변부 국민문학이다. 국민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이제 한강과 함께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화폐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오늘 이후로 한국문학은 언제든 국제적 유통이 가능해졌다는 것, 그것이 한국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진정한 공적이다.

마지막으로 오래전부터 한강의 작품들을 따라 읽어온 사람으로서, 이제 어림잡아도 수십만 명은 되었을 한강의 독자들에게 스포일러 비슷한 축하의 말쯤은 남겨두고 싶다. 이런 말이다. '당신은 지금 고통을 펼치셨습니다. 부디 모국어로 된 그 고통을 축복처럼 누리시기 바랍니다.'




김형중 문학평론가·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