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수박 맛, 빗소리 알려주자" 아이 안 낳으려던 한강 마음 돌린 이 말

입력
2024.10.13 15:47
2000년 계간지 실렸던 자전소설 '침묵' 화제
한강 남편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며 설득
'여름 수박 맛'에 자녀 낳기로 결심한 한강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도 하잖아?(중략)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중략)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한강의 자전소설 '침묵'의 일부

노벨문학상 수상 낭보가 날아든 10일 "아들과 차를 마시며 축하하겠다"고 밝힌 소설가 한강은 사실 자녀 갖는 것을 망설였다. 한 인간의 일생을 멋대로 시작토록 하는 게, 또 잔혹한 현실을 경험케 하는 게 한강으로선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남편이 언급한 여름철 수박의 맛이 한강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한강은 이 일화를 2000년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발표한 자전소설 '침묵'에 담았다.

13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강과 당시 남편이 나눈 대화가 담긴 '침묵'의 한 단락이 회자되고 있다. 결혼한 지 2년에 이르렀고, 남편이 출산을 망설이는 한강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한강은 "아이가 그 생각(세상은 살아갈 만하다는)에 이를 때까지, 그때까지의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올지,(중략)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몫도 결코 아닌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남편이 여름 수박, 봄 참외,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의 맛에 대해 말하고, 빗소리와 눈 오는 것 등도 언급한다.

이후로 여름의 수박 맛은 한강이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다. 한강은 "그 수박의 맛이 그날 이후 나의 화두가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내 단단한 마음에 금을 그어간 균열의 처음이 되었다"면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의 중요한 일들의 대부분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결정되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은"이라고 썼다.

자전소설 '침묵'은 이 외에도 슬하에 한강을 비롯해 세 자녀를 둔 그의 어머니가 앞서 두 아기를 조산으로 잃은 이야기,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이유, 임신 초기 입덧과 무기력 등으로 겪은 고통, 그러면서도 한강에게 다가온 생의 기쁨들을 다루고 있다. 한강은 소설 말미에 "언젠가 나는 늙고 죽겠지"라면서도 "이상하지. 그 모든 일들이 어쩐지 예전만큼 두렵지 않아"라고 읊조린다.

24년 전 발표된 '침묵'의 이 대목을 접한 누리꾼들은 새삼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이다. 한 누리꾼은 "글만 읽었는데도 수박을 한 입 베어문 느낌"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들도 "여름에 마루에 앉아 있는 것처럼 빗소리가 들리고 땀방울 맺힌 채 가족들과 둘러앉아 먹는 수박의 맛을 상상하게 된다",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도 많다",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작은 행복의 소중함이 정말 아름답다"며 공감했다.

이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