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속간된 계간 문예지 '창작과 비평(창비)'은 대학생들에게 필수 교양 도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 시절 캠퍼스엔 창비 전집(全集)을 팔던 이도 많았다. 대학 측의 권장 도서도 아니었지만 진보와 민족문학론 색채가 짙은 '창비' 정도는 안다고 해야 행세깨나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념 성향이 달라지지 않은 창비에서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53) 작가가 '채식주의자(2007년)', '소년이 온다(2014년)'를 출간한 건 그의 미래 지향적 담론에 기인한 게 컸을 터다.
한강의 부친 한승원(85) 소설가의 평가도 다르진 않았다. 그는 11일 오전 고향인 전남 장흥에 있는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이는) 한국 작가로서 생각이 아니라, 세계적 감각의 작가로 바뀌어 있더라"고 했다. 한강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 전쟁이 치열하고, (그 전쟁터에서) 주검이 실려나가고 있는데 뭐가 즐거워 기자회견을 하겠냐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다. 한승원은 이어 "강이의 문장은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프다"며 "특히 소설 속에 환상적 리얼리즘을 가미해 문학을 더 아름답게 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 껍질이고, (강이는) 알맹이다. (강이는) 시적인 감수성을 가진, 좋은 젊은 소설가"라고 치켜세웠다. 2016년 5월 한강이 한국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자 "(강이는) 이미 나를 뛰어넘었다"고 했던 그다.
장흥군 주민들 반응도 비슷했다. 이날 오후 대덕읍 천관문학관에서 만난 주민 신진우(61)씨는 "부전여전(父傳女傳) 아니겄소. 그 유전자가 어딜 가겠냐"고 했다. 한강이 태어난 곳은 광주광역시이지만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곳은 장흥이란 얘기였다. 그는 "한강은 장흥의 작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강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작품을 통해 세계 문학계에 존재감을 알린 건 한승원의 딸로 계대(繼代)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실제 한강은 아버지의 자서전 '산돌 키우기'에 대해 "이 책 속엔, (내가) 어릴 때부터 들어왔으므로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내가 소설로 썼거나, 쓰는 중이거나, 앞으로 쓰려고 계획해온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장흥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장흥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 가사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1522∼1556), 당대 문장가인 이청준(1939∼2008), 송기숙(1935∼2021) 등 걸출한 문인을 낳은 곳이다. 그 덕에 전국 최초 '문학 관광 기행 특구'로 지정됐다. 주민들은 "장흥은 글자랑 하기 쉽지 않은 문림(文林)의 고장"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서 만난 주민들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물으면 "영광", "전율", "기적", "쾌거" 등 주로 단답형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특히 주민들 사이에선 노벨문학상 수상의 감동과 그 여운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한승원 가족문학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강의 오빠(한동림)는 소설가이고, 남동생(한강인)은 만화 작가다.
장흥읍의 한 식당에서 만난 최민성(58)씨는 "이 정도면 '장흥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文人) 대가족 아니냐"며 "생존 문인이란 이유로 문학관 건립 추진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성 장흥군수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머니 품 장흥의 문화·예술·관광의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데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라며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부녀 작가 기념관을 건립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