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나는 깨어나, 오 내 사랑 안녕!"
9일(현지시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유럽의회 회의장에 별안간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란을 일으킨 건 친(親)유럽 성향 의원 수십 명. 이들은 유럽연합(EU) 순회의장국인 헝가리의 극우 성향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이날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중단'을 주장하자 이탈리아의 반(反)파시즘 민중가요 '벨라 차오'를 부르며 격하게 항의했다. 이에 다른 극우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같은 유럽의회 소동은 최근 EU의 분열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이나 이주민 문제 등을 놓고 극단 대치를 이어가던 유럽 구성원들이 급기야 유럽의회 회의장에서 고성까지 지르며 대립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7월 헝가리가 EU 순회의장국을 맡은 뒤 갈등은 더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고 한다.
영국 가디언은 "유럽의회 회의는 통상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행사였다"며 "이제는 개인적인 모욕이 나오는 시끄러운 회의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유럽 의원들이 노래를 부르며 항의 표시를 한 것은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논의가 진행됐던 2020년 1월 이후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점잖았던 유럽의회 의원들을 충돌하게 만든 의제는 단연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문제였다. 특히 EU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 수익금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안건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다. EU는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역내 러시아 자산 2,700억 유로(약 404조 원)를 동결했다. 그리고 이 자산의 이자 수익 등 350억 유로(약 52조 원)를 우크라이나에 대출해주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날 헝가리 등 반유럽 진영도 지원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오르반 총리는 최종 승인 결정 시점을 다음 달 5일 미국 대선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하는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미국의 정책 기조가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친유럽 인사들은 미 대선 전인 이달 30일까지 승인 절차를 마무리해 EU 지원을 못 박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금 지원 지연을 바라보는 우크라이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동부 격전지 약세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부 보급 요충지인 포크로우스크 길목에 있는 마을 한 곳을 추가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군 역시 러시아 서부 브랸스크주(州)에 있는 무기고를 무인기(드론)로 타격했으며, 북한이 지원한 탄약 수십만 발 등을 파괴했다고 밝혔다.
서방이 지원한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하기를 원하는 우크라이나의 외교전도 지지부진하다. 미국·독일·영국·프랑스 등 20개국이 참여하기로 했던 12일 우크라이나방위연락그룹(UDCG) 정상회의가 이날 전격 취소된 것이 대표적 신호다. 표면적으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국에 상륙한 초대형 허리케인 '밀턴' 피해에 대비하겠다며 8일 불참을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다음 달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이 전쟁 문제와 거리를 둔다는 해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 매체 키이우포스트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에 군사 지원 및 러시아 타격 허용을 설득할)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선언했던 상태였다"며 "(이번 UDCG 정상회의 취소 소식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 확실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