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때 쌓은 430년 된 왜성(倭城), 아직도 40여 개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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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4 04:30
24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7> 전남 순천왜성

한반도에 외국인이 들어와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성을 쌓았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요즘 인기 컴퓨터 게임인 ‘외계인 침공’에나 나올 법하다. 그런데 실제로 왜인(倭人)이 쌓은 성 40여 개가 남해안 일대에 있다. 그리고 그중 순천왜성(順天倭城·전남 순천시 해룡면)은 지긋지긋한 두 왜란(임진왜란, 정유재란)의 막바지에 조·중(朝中) 연합군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간 혈전이 벌어진 곳이다. 아울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연유가 서린 유적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의 전쟁은 곳곳에 슬프고 처절한 이야기를 남겼지만, 이 왜성들만큼 전쟁의 흔적이 격하게 다가오는 유적은 없을 것이다. 해풍에 흔들리는 들풀, 가파른 비탈에 의연하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 숲을 차례로 지나 성 꼭대기의 천수각 터에 오르면, 이 평화스러운 풍경 속에서 전해지는 뼈아픈 역사가 가슴을 끓게 한다.


사적에서 지방 기념물로 강등되다

순천왜성은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돼 오다가 1963년 ‘국가사적 49호’(당시 승주 신성리성·昇州 新城里城)로 지정됐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 시절 ‘‘왜X’ 유적을 국가사적으로 예우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면서 서울의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을 없애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을 시행했다. 이때 순천왜성도 왜의 유적으로 분류돼 1997년 사적에서 해제됐고 1999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됐다. ‘사적’에서 ‘도 기념물’로 ‘강등’된 셈이다.

왜성들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었던 것은 당시 대부분의 사적이 일제강점기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년)에 의해 지정됐고 이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왜성은 식민 통치의 상징이었다. 더구나 순천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마지막까지 버틴 성’이었기에 일본 입장에서는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 순천왜성을 사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적을 잘 보존하고 잘 활용하는 것은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아울러 후세가 미래를 설계하는 데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만일 수치스러운 유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는 각오가 생길 것이다. 한 번의 분풀이로 훼손하면 오히려 과거에서 배울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눈앞에서 사라지면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법이다. 순천왜성, 여러 측면에서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다.


왜성이 왜 남해안에?

왜성은 돌로 쌓은 성벽의 하부가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석축의 모서리를 장대석의 장변과 단변을 교차로 쌓는 ‘산기즈미’(算木積み·산가지 쌓기) 기법이 특징이다. 또 문지는 적 공격 시 진입 동선을 왜곡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만든 호구(虎口·호랑이 아가리) 형태다. 여기에 마루(丸·둘레)라고 부르는 성과 목책 등 내부 방어선이 겹겹이 배치돼 있다. 제일 높은 곳에는 지휘관이 전투를 지휘하는 천수각(天守閣)이 있다.

왜군은 임진왜란(1592년) 초기에 오늘날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동·남해안 일대를 침략 거점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왜성을 쌓았다. 이후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켰지만, 경기도 직산(현 충남 천안·아산시, 경기 평택시 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패하면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이에 장기전을 펴기 위해 경남 서부 해안 지역과 순천에 새로 거점을 만들었다. 또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바다를 장악하니, 왜군 입장에서는 불안한 보급로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명(明)대 책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에 언급된 왜성 40여 곳 중 순천왜성은 전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된 왜성이다. 지략이 뛰어났다는 고니시가 1597년 9~12월까지 3개월 만에 쌓았다. 성의 규모가 크고 천수각 건물까지 완성한 것으로 미뤄 엄청난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전쟁 중에 지어졌으니, 지역민의 피폐함이 극심했을 것이다. 왜란 이후 일본의 성들은 더 견고해졌는데, 이는 조·중 연합군에 공략에 견디면서 터득한 방법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난공불락의 왜교성

순천왜성은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曳)교성이라고 불린다. 삼면이 광양만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 절벽 위에 5층 규모의 흰색 천수각이 서 있었으니 장관이었을 법하다. 지금은 공단이 매립지에 들어서 원래 해안 경관과는 매우 다르다.

순천 시내에서 광양만으로 향하면, 조·명 연합군이 주둔했던 검단산성이 나타난다. 산성 자락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니, 옛 충무초등학교 부지에 조성한 '정유재란 기념학습 체험장'이 있는 능선이다.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따르면 이곳이 순천왜성의 외성(外城)에 해당되는데, 오늘날에는 남쪽 맞은편 산등성이에 돌로 쌓은 문지와 내성(內城)만 보인다. 그림에는 기념 광장이 있는 능선과 내성이 있는 골짜기에 만입한 수로를 확장한 해자를 만들어 내성을 방어하도록 했다. 다만, 지금은 해자가 상당 부분 메워져 마치 작은 호수처럼 남았다.

성은 길이 1,342m의 내성과 해발 57m 평탄한 곳에 자리 잡은 본성(本城), 그리고 반대편 능선까지 2,500m가 넘는 규모의 외성으로 구성돼 있다. 내성과 내성 바깥을 인위적으로 격리시킨 것이 해자이고, 해자 위에 놓인 다리가 왜교(倭橋)다. 먼저 이 왜교를 건너면 진입 시 지그재그로 들어가도록 만든 두 개의 문지가 나오고, 두 문지 사이에 ‘마스가다'(枡形·성문 안의 네모진 빈터)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상당한 비탈면을 올라가야 비로소 내성과 본성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림에는 문지 일대에도 목책이 둘러쳐 있어 내성이나 본성 쪽으로 접근하기 더욱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성과 문지 위에는 숨어서 총을 쏠 수 있도록 여장(女牆·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같은 보호시설이 있었다. 또 내성 동편 가장 높은 곳에는 천수각이 배치돼 있는데, 육지전(순천 시내 방향)은 물론 해전(광양만 방향)까지 지휘가 용이한 위치다. 지키고자 한다면 진입이 힘드니, ‘난공불락’이란 단어가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실제로 조·중 연합군이 함락시킨 왜성은 순천왜성을 포함해 단 한 곳도 없었다.


독 안에 든 쥐, 왜 놓쳤나?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5만 명이 넘는 조·중 연합군이 왜장 고니시를 잡지 못했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고니시가 전투를 지휘하고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은 요즘 액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다. 여우 같은 고니시가 강화 회담장으로 오다가 속았다는 것을 알고 성으로 급히 되돌아가는 장면은 기록에도 있고 그림에도 있다. 또 영리하고 치열하게 수비하는 왜군에 비해 명나라 군대는 날카롭지 못했다. 나주 출신 의병 진경문은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에서 명군의 공격에 대해 ‘아이들 장난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후 명군 사령관 유정은 권율 장군의 전투 간청을 무시하고 싸우기를 두려워하며 기다리기만 했다. 왜군의 선물이나 ‘일본으로 돌아가게만 해 준다면’ 등의 회유 공세에 넘어갔거나, 남의 나라 전쟁에 자신들의 피를 흘리는 것을 내심 꺼렸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노량해전에서도 연출된다. 노량해전은 고니시의 탈출로를 차단하는 한편, 왜교성의 왜군과 남해 쪽의 왜군 구원병의 협공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순신 장군을 흠모한 진린 제독조차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선뜻 공격을 하지 못하다가, 이순신 장군이 읍소하며 스스로 나서자 그제야 할 수 없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전황이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왜장 고니시는 이 틈을 이용해 왜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으로 온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고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이 마지막 해전에서 명 해군 부총병 등자룡이 전사했는데, 그나마 왜교성 전투에서 명군의 존재를 드러낸 장면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국제전의 교훈이다.


왜란,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

‘정유재란 역사체험학습장’ 앞 평화광장에는 평화 기원 문구가 새겨진 수많은 돌이 깔려 있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는 왜란 중 백성들의 피폐한 모습이 조각돼 있다. 수년 전 일본 교토 시내 한복판 ‘조선인 코 무덤’ 앞에서 민초의 지옥 같은 왜란 현장을 상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국립진주박물관이 간행한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양란 당시 피란 일지)을 뒤지다가 지난 현충일에 순천왜성을 다시 찾았는데, 그 처절함이 더욱 마음속에 찡하게 울려왔다.

전쟁의 아픔은 인간에게 지독한 상처를 남긴다. 왜란 당시 고니시와 함께 또 다른 왜군 사령관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우물이 없던 울산왜성을 구하러 갔다가 오히려 조·중 연합군에 포위되는 바람에 오줌과 흙물을 마시면서 연명했는데, 그 초췌한 모습이 귀신 같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으로 달아난 뒤 구마모토성을 축성했는데, 성내에 샘을 많이 파도록 했다. 목말랐던 생지옥의 기억 때문이리라. 또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섬에 갇혀 보름간 미역만 먹었는데, 아직도 그의 제삿날에는 ‘조상의 고통을 기억한다’며 미역을 먹는 풍습이 전해 온다고 한다. 물론 이 정도의 저주는 많은 조선인을 악랄하게 죽이고 살아 돌아가 영화를 누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깨끗하게 정비된 순천왜성에서 더 이상 전투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노량해전 등 처절했던 왜란의 마지막 장면이 율곡 선생의 ‘십만양병평화론’과 오버랩되는 것은 ‘라떼’만 해도 전쟁의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전쟁의 참혹한 기억은 평화를 유지하는 힘이 된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