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단백질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겼을지 인공지능(AI)으로 예측하는 방법을 찾는 데 기여한 연구자 세 명에게 노벨화학상의 영예가 돌아갔다. 단백질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과 연관돼 있어, 필요한 단백질을 적합한 모양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 바이오와 신약 개발, 의료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9일(한국시간)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데이비드 베이커(62) 미국 워싱턴대 교수,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48) 최고경영자(CEO)와 존 점퍼(39) 수석연구원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베이커 교수는 새로운 종류의 단백질을 만드는 방법을, 허사비스 CEO와 점퍼 연구원은 AI를 이용해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프로그램 '알파폴드'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가지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은 체내 생명 활동의 기초가 된다. 베이커 교수는 2003년 아미노산을 조합해 기존에 없던 단백질을 설계해냈다. 사람 손으로 새로운 단백질 조각을 처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반쪽짜리' 성과일 수밖에 없다. 단백질이 기능을 하려면 사슬처럼 연결된 아미노산이 3차원으로 접혀야 하는데, 이때 어떤 구조로 접힐지까지 알아야 원하는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구글 딥마인드는 이런 구조를 예측하는 AI 모델, '알파폴드2'를 내놨다. 수많은 연구진이 이를 사용해 2억 개에 달하는 단백질 구조를 대부분 분석해냈고, 이를 통해 항생제 내성을 이해하거나 플라스틱 분해 효소를 그려내는 등 다양한 과학적 응용이 이뤄지고 있다고 노벨위원회는 설명했다. 베이커 교수 역시 AI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프로그램 '로제타 폴드'를 만들어 발표했다. 석차옥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이들의 연구 덕분에) 생체 분자도 원하는 모양과 성질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바이오나 신약 개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날 발표된 노벨물리학상에 이어 노벨화학상까지 AI 관련 연구가 거머쥔 데 대해 과학계는 "이례적"이라면서도 고무된 모습이다.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물리학을 기반으로 AI 기술인 머신러닝(기계학습)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화학상 수상자들은 AI 기술을 활용해 화학 분야 난제인 단백질 구조 설계와 예측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베이커 교수는 수상소감을 통해 "AI를 이용한 방법론이 이전의 전통적 과학 방법론에 비해 강력하고 정확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밝혔다.
순수 자연과학에 주로 돌아갔던 노벨 과학상이 정보기술(IT)과 융합된 응용과학 쪽으로 확대되면서 파급 효과에 대한 기대도 커질 전망이다.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는 "앞으로 AI는 과학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며 "수상자들은 과학의 방법론이 바뀌는 패러다임 시프트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