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후보 거부하자 'AI 대역'과 대신 토론... 미국 선거에서 실제로 벌어질 일

입력
2024.10.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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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하원의원 무소속 후보
민주당 유력 후보가 토론 거부하자
'AI 대역' 직접 만들어서 토론 예고


선거 구도가 크게 기울어져 있을 때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는 지지율이 현저히 차이 나는 후보의 토론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만 있어도 당선이 유력한데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강한 후보가 토론에 응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은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강점을 내보일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진다.

미국 버지니아주(州)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 무소속 후보가 이런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겠다며 독특한 방식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본업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그는 상대 후보의 인공지능(AI) 대역을 만들어 이른바 'AI 후보'와 대신 토론을 하겠다고 밝혔다. 유권자들이 후보에 대해 알권리가 있음에도 유력 상대 후보가 거듭된 토론 요청에 응하지 않으니 고육책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버지니아주 8선거구 하원의원 선거 무소속 후보인 벤틀리 헨셀은 민주당 현역 의원인 돈 바이어의 AI 챗봇인 '돈봇'과 오는 17일 토론을 실시할 예정이다. 돈봇은 헨셀이 생성형 AI 챗GPT의 기반이 되는 AI 모델에 바이어의 공식 웹사이트, 보도자료, 연방 선거관리위원회 데이터 등을 학습시켜 제작했다고 한다. "AI 챗봇은 유권자들을 혼동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며, 정확한 답변을 제공하도록 훈련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바이어는 직전 선거에서 75%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현역 의원이다. 재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바이어 등 후보들과 한 차례 토론을 한 헨셀은 그에게 추가 토론을 요청했으나 바이어 측이 거부하자 돈봇을 만들었다. "우리 지역구의 유권자들은 모든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문제에 대해 들을 권리가 있다"는 게 헨셀의 설명이다. 이 같은 취지에 공감해 다른 무소속 후보인 데이비드 케네디도 토론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돈봇과 미리 대화해 본 로이터에 따르면 돈봇은 바이어의 정책 관련 질문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답변을 내놨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사실이나 통계를 사실처럼 말하는 이른바 '환각' 현상을 몇 차례 보였다고 한다.

헨셀의 예고대로 3자 토론이 성사될 경우 실제 선거에 나선 후보가 'AI 후보'와 토론을 하는 세계 최초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돈봇은 바이어의 허락 없이 제작됐다는 점에서 비난 소지가 있으나 법적 제재는 어렵다고 한다. 헨셀이 돈봇을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유권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현행법에는 저촉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버지니아에는 딥페이크(AI 기반 이미지 합성) 방지법이 있기는 하나 성적인 콘텐츠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고 한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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