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 버튼을 누르기가 불가항력처럼 보이는 울트라 패스트 패션의 시대. 쇼핑을 합리화하는 이 같은 목소리가 당신 귀에도 수시로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 옷을 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를 마다하고 옷 쇼핑에서 해방된 이들이 있다. 직장인 이소연(29)씨는 6년째 옷을 사지 않았다. 프리랜서 작가인 임다혜(41)씨는 1년 중 300일은 옷 쇼핑을 멈춘다. 소비에 '요정'이란 귀여운 수식이 붙는, 소비가 곧 미덕이 된 세상에 물건을 쉽게 사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무절제한 옷 쇼핑을 중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소연씨는 2019년 미국의 한 패스트 패션 매장에서 1.5달러(약 2,000원)짜리 패딩 점퍼를 발견했다. 인턴십을 위해 머물던 '쇼핑의 천국' 미국에서 "매일같이 옷을 사던 시절"이었다.
"그 전에 산 옷들도 1달러, 49센트 등으로 싸긴 했어요. 그런데 이 패딩은 솜도 들어 있고 페이크 퍼도 달려 있는데 어떻게 1.5달러일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이유를 찾아보면서 '라나 플라자' 붕괴 참사도 알게 됐죠(글로벌 패스트 패션 기업의 하청 공장이 대거 입점해 있던 방글라데시의 건물이 붕괴돼 1,129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엔 나이가 10대 후반인 노동자가 많았는데, 내가 샀던 옷들을 나보다 어린 노동자들이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분노가 일었어요."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값싼 옷을 최대한 빠르게, 많이 만드는 패스트 패션의 굴레를 이씨가 자각한 순간이었다. "당시 인턴십 주제는 미국의 재활용 문제였어요. 에코백이나 텀블러를 쓰는 정도로 나름 환경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쓰레기가 될 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옷을 사고 있었던 거죠."
임다혜씨도 3년째 주기적으로 옷 쇼핑을 멈춘다. 그는 지인 20여 명과 함께 온라인 단체 대화방에서 '100일 동안 옷 안 사기' 모임을 갖는다. 멤버들은 '오늘 입은 옷'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뒤, 이를 매일 단톡방에 공유하며 서로를 감시한다. 임씨는 "사진을 찍다 보면 내가 입는 옷만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유행하는 옷을 살 필요도, 많은 옷을 소장할 필요도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
약속한 100일이 지나면 기다렸던 쇼핑을 한다. 이때 보복 쇼핑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임씨는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 뒀던 옷을 사려고 다시 보면 '내가 이걸 왜 사려고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한국은 국제 중고 의류시장에서 명망 높다. 한국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헌 옷만 환경부 추산 225톤. 연간 중고 의류 수출액은 3억4,770만 달러(유엔·2021년 기준)로, 미국, 중국, 영국,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다. 국가별 인구를 감안하면 1인당 수출액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높다.
중고 의류 무역업체 대표는 "우리나라 헌 옷이 세계적으로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다"며 "우리 회사에서만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로 헌 옷이 매일 40~45톤씩 팔려 나간다"고 말했다. 대부분 더운 나라들이어서 반소매 옷 가격이 긴소매 옷보다 비싸게 책정된다고. 헌 옷의 질이 좋다는 건 사실 칭찬이 아니다. '새 옷 같은 헌 옷'을 많이 버린다는 의미다. 수출되고도 안 팔린 옷들은 결국 지구 어딘가에 버려진다. 대개 선진국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가난한 나라들이다.
패션산업과 기후변화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오정미 부산대 기후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패스트패션이 옷을 너무 많이, 너무 싸게 만들다 보니 피해가 크다"며 "주로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목화를 따고 가난한 나라가 옷 쓰레기를 떠안는다는 점에서 패션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고 말했다.
친환경 섬유로 옷을 만드는 것도 근본적인 해법은 될 수 없다. 홍수열 순환경제사회연구소장은 "친환경 소재도 면처럼 환경 부하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며 "양에 대한 고민 없이 소재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 교수가 쓴 책 '패션의 비용'에 따르면, 1년 이내로 자연 분해되는 면도 생산 과정에서 물과 농약 등 자원이 막대하게 소요된다. 예컨대 면실 1㎏를 생산하는 데 물이 1만~2만 리터 든다.
옷의 생산과 소비량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세계 옷과 신발 소비량은 2015년 6,200만 톤에서 2030년 1억200만 톤으로 2배가량 증가할 전망이다(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2019년 기준).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변해야 한다. 오 교수는 "의류와 섬유 제품 생산자에게 재활용 의무를 부과하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나 제품의 생산정보를 추적할 수 있는 디지털제품여권(DPP)을 도입하고 소비자도 옷을 쉽게 버리지 않고 수선해서 입는 등 책임 있는 윤리적 생산과 소비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옷 적게 사기는 시작이 반이다. 생각보다 대단한 절제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씨도 정확히는 '새 옷'만 안 샀을 뿐이다. 옷이 널린 세상에서 새 옷을 안 사고도 옷장을 다채롭게 채우는 방법은 많다. 교환이 대표적이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과 '언젠간 입겠지' 했지만 입지 않은 옷들을 바꿔 입는다. 중고 거래도 이용한다. 엄마의 옷장도 자주 들여다본다.
사실 옷이 없어서 옷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구매 버튼을 홀린 듯 누르는 순간의 만족감에 중독된 탓에 습관적으로 쇼핑 앱을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블랙프라이데이에 뭔가 사야지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는 것처럼. 이씨는 "저도 많이 사 봐서 아는데, 살 때만 기분이 좋고 사고 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택배 박스도 안 뜯어본 적이 있다"며 "소비 충동의 유효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고 했다. 그러면서 "올해가 3개월도 안 남았으니 연말까지만 한 번 참아보라"고 말했다. 블랙프라이데이에 '바이 낫싱 데이(Buy Nothing Day)'를 당당히 외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쇼핑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 당신, 3개월이 너무 긴가. 그러면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딱 하루만 참아보자. 수시로 고개를 드는 '옷 사고 싶다'는 마음, 그게 허욕(虛慾)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