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해리스 탓 이민자 들어와" vs "트럼프의 거짓말"… 복잡한 애리조나 민심

입력
2024.10.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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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미국 대선 격전지를 가다-2회>
지난 대선서 24년 만에 바이든 신승
'퍼플 스테이트' 거듭난 애리조나주
해리스 지지자 "어게인 2020" 노려
트럼프 측 "이변? 두 번은 없을 것"


낮 최고기온 섭씨 41도(화씨 106도)를 기록하며 10월로는 이례적으로 주(州) 전역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주도인 피닉스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 I-17에 들어서자 도로 오른편 큰 광고판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애리조나주를 상징하는 뜨거운 태양 로고 위에 '해리스를 위한 애리조나 중도 성향 유권자들'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힌 초대형 선거 광고였다.

이 광고판은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뽑겠다는 공화당원 단체가 설치한 것으로, 이날 기준 I-17 등 피닉스 안팎 고속도로에 총 35개가 설치돼 있었다. 주요 길목에는 여지없이 배치된 것이다.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이 설치한 맞불 광고판도 이따금 보이기는 했지만 그 숫자는 현저히 적었다. "지금 피닉스에 가면 해리스를 지지하는 공화당원들의 광고판으로 도시가 도배된 것을 보게 될 것"(블룸버그통신)이라는 예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2020년 레드→퍼플 변신한 애리조나

해리스 지지 공화당원 모임은 이번 대선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조지아· 애리조나 등 7개 경합주 모두에서 결성됐지만, 애리조나에 가장 많은 홍보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정성을 쏟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애리조나는 2020년 대선 전까지 24년 동안 5차례의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적 없는 전통적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강세 주)였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애리조나는 1996년(민주당 빌 클린턴 승리)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1952년부터 내리 공화당 후보 손을 들어줬다.


그랬던 애리조나가 '퍼플 스테이트'(공화당 상징색인 빨간색과 민주당 상징색 파란색이 반씩 섞인 보라색처럼 지지 성향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경합주라는 뜻)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단 1만1,000표, 0.3%포인트 차로 신승하면서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당 지지 성향 유권자가 많은 캘리포니아·워싱턴 등 서쪽 주들과 멕시코 등에서 많은 인구가 새로 유입되며 주의 색깔을 바꾼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 애리조나주 등록 유권자 수는 약 410만 명이다. 2010년 310만 명에서 14년 동안 1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인구가 계속 증가세라고 해서 지난 대선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해리스 부통령이 이기지 않겠느냐고 점친다면 오산이다. 주 당국에 따르면 7월 기준 애리조나 유권자는 공화당원이 35%, 민주당원 29%, 아무 쪽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약 34%로, 절묘하게 3분의 1씩을 점하고 있다.


애리조나 민심은 '가장 진한 보라'

애리조나 주민들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이슈로는 '경제'와 '이민'이 번갈아 꼽힌다.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애리조나는 텍사스와 더불어 가장 많은 불법 이민자가 넘어온 주다. 대선 당일 임신중지(낙태) 허용 찬반 투표를 함께 실시하는 10개 주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 최대 이슈로 꼽히는 경제와 이민, 재생산권(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문제와 모두 예민하게 얽혀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선거인단 11명이 걸린 애리조나는 선거 결과를 점치기가 제일 까다로운, '가장 진한 보라'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주민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대선을 정확히 한 달 앞둔 5, 6일 애리조나 인구 10명 중 6명이 사는 마리코파카운티(카운티는 기초 행정 구역)를 집중적으로 훑었다. 곳곳의 해리스 지지자들은 "어게인 2020"을 외쳤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두 번의 이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애리조나의 선거 열기는 달아올라 있었다.



불법 이민자 이슈 민감한 백인 유권자

마리코파카운티는 주도 피닉스를 비롯해 미국인들이 은퇴 후 거주지역으로 선호하는 스코츠데일, 글렌데일, 템피, 메사 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카운티 인구의 약 30%가 히스패닉계로, 미국 전체 평균 약 20%보다 높다.

이민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만큼 해리스 지지자가 많을 것으로 막연히 예상했지만, 스코츠데일 주택가 집 앞에 꽂혀 있는 팻말 10개 중 8개는 '트럼프'였다. 집 전면에 트럼프 지지 현수막을 늘어놓은 한 백인 중년 여성에게 "주변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웃이 많냐"고 묻자 "여긴 원래 대부분 공화당원"이라는 답이 당연하다는 듯 돌아왔다.

다른 많은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위스콘신주 출신의 52세라고만 밝힌 한 백인 여성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것을 고칠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라며 "트럼프 4년 동안에는 힘을 통한 평화로 통치해 전쟁이 없지 않았나. 바이든과 해리슨이 백악관에 들어가니 다른 국가들이 미국을 약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주장과 판박이였다.

각종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 이민자 급증 문제는 애리조나에서도 특히 공화당 소속 유권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집 앞과 차를 트럼프 지지 문구로 꾸며 둔 켈리 앤더슨(60)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강력한 국경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바로 작년까지 민주당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남부 국경을 통해 들어오도록 허용했고 그것이 이 나라 전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치안이 많이 안 좋아진 것을 체감하냐"는 질문에는 "범죄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다"(I do hear about reports of crime)고만 말했다. 중년 백인 남성 실라스 역시 "그들(불법 이민자)은 미국인들의 목숨을 빼앗고, 강간하고, 동물을 잡아먹는 등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측의 근거 없는 주장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백인 토박이가 많은 주택가와 달리 애리조나주립대 등 대학가와 시내에서 만난 이들 중 자신을 트럼프 지지자라고 밝힌 사람은 10명 중 2명에 불과했다. 대체로 지지 후보가 없거나 "해리스를 뽑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불법 이민지로 인한 치안 악화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진단을 내놨다. 캐런 길포드(57)는 "애리조나에서만 30년 넘게 살았지만 이민자들 때문에 동네가 불안해진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며 "너무나 과장된(overstated) 이야기"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찍었다는 그는 "트럼프는 심각한 거짓말쟁이(a big-time liar)"라며 그의 거짓말이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고 덧붙였다.


무당파 잡을 이슈 '여성 재생산권'

젊은 유권자들은 재생산권에 대한 입장이 자신의 선택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리조나주립대 재학생인 미아(20)는 "그(트럼프)는 (임신중지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것에 대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말했다"라며 "이제는 여성의 생식권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원래 사람들이 원하는 무슨 말이든 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같은 대학교 앞에서 만난 세라(26)는 미아 같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전단지를 나눠 주며 재생산권 관련 주민 발의안 139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나 역시 8개월 만에 태어난 조산아"라며 "모든 아이는 미처 선택할 수 없을 때에도 존중받아야 한다. 예외적으로라도 낙태는 허용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생산권 문제는 애리조나 주민들이 꼽는 최우선 이슈는 아니지만, 지지 후보를 정해두지 않은 사람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여성의 선택권이 우선이냐, 생명 보호가 우선이냐에 대해서는 입장이 있을 수 있고, 이에 대한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와 자신과 같은 입장을 주장하는 당의 후보에게 한 표를 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애리조나주립대 히스패닉 리서치 센터를 이끄는 스텔라 루즈 교수는 한국일보에 "재생산권 문제가 이번 대선에서 새롭게 떠오름에 따라 젊은 여성이 가장 주시해야 할 유권자 집단이 됐다"고 평했다.

한 달 뒤 애리조나 민심은 누구를 밀어줄까. 루즈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우세에 맞서 해리스 부통령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면서도 "선거에서 한 달은 길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피닉스·스코츠데일·템피(미국 애리조나주)= 이서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