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를 싫어한다. A는 상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다. 이 사실을 안다면 심근경색이 있는 상사가 죽을지도 모른다. 술김에 지인에게 불륜 사실을 말했고 이 이야기가 상사의 귀에 들어가 그가 죽었다. 법은 A를 처벌할 수 있는가?
서울시극단의 신작 연극 '트랩'(변유정 각색, 하수민 재각색·연출)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소설 '사고'를 각색한 작품이다. '노부인의 방문'으로 유명한 뒤렌마트는 역설과 아이러니, 유머와 풍자를 통해 정의와 인간의 구원 문제를 탐구해 온 작가다. '트랩'을 비롯한 그의 작품은 흔히 희비극으로 분류되며 웃음 뒤에 삶을 성찰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극장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무대를 뒤덮은 붉은 카펫, 한쪽 테이블에 준비된 만찬 음식과 대형 피아노가 보인다. 객석은 디귿(ㄷ)자로 돼 있고 법정에서나 볼 법한 목재 펜스가 무대와 객석을 가른다. 그래서 극장 안은 대저택 만찬장 같으면서도 법정 느낌을 준다.
섬유회사의 외판 총책임을 맡고 있는 트랍스는 최신 8기통 스포츠카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퇴직 판사의 집에 묵게 된다. 그곳에서는 매일 밤 전직 검사와 변호사, 사형 집행관이 모의재판을 벌이며 소일한다. 이들은 그날 밤 트랍스를 피고로 모의재판 게임을 한다.
재판정에 선 트랍스는 고백할 죄가 없다며 당당하다. 무죄를 주장하는 트랍스와 그의 죄를 찾아내 죄목을 밝히려는 검사가 치열한 법정 대결을 펼친다. 재판은 트랍스의 죄를 찾아내려는 수사물적 성격을 띤다. 흥미진진한 재판 과정은 만찬이 곁들여져 축제의 성격을 더한다. 실제 음식들이 제공되며 벌어지는 법정 다툼은 긴장감 넘치는 대결임에도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유쾌하게 전개된다.
허술해 보이지만 능수능란하게 유도하는 검사는 트랍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죄를 상기시킨다. 서두에 언급한 A가 바로 트랍스다. 상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사가 죽게 되면서 외판 총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트랍스는 검사의 부추김에 자신이 했던 일을 실토하고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된다. 상사의 죽음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검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 트랍스가 악의적 의도로 상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사형을 구형한다.
스스로도 각성하지 못한 죄를 찾아내고 형을 선고하는 전직 법관 노인들은 과장된 어깨를 한 법복과, 그 안으로 삐죽 삐져나온 속옷에, 짝짝이 양말을 신고 까치 머리를 하고 있어 비현실적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은퇴한 법관 노인들이 벌이는 게임인지, 법이 심판하지 않은 인간의 죄를 단죄하기 위한 신의 재판인지 모호하게 진행된다. 관객은 모호함 때문에 더 극에 집중하게 된다.
연극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향한다. 현실 법정에서 트랍스가 유죄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더욱이 사형을 받을 확률은 희박하다. 이것이 전직 법관들이 벌이는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형량이다. 사형이 선고됐고 전직 사형 집행관이 이 게임에 참여하고 있지만 실제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는다. 판사의 사형 선고로 모두가, 심지어 트랍스마저도 유쾌하게 게임을 마치고 만찬은 절정에 이른다.
폭풍 같은 만찬이 지나간 탁자에는 남은 음식과 빈 접시, 와인과 와인잔이 즐비하다. 그리고 트랍스가 목을 맨 장면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게임을 통해 자신의 죄를 각성한 트랍스는 자신이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던 원죄를 확인하고 스스로를 사형으로 단죄한다. 그의 죄가 현실 법원에서는 심판할 수 없는 죄일지라도 트랍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형벌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음주 운전 사고를 내고도 무거운 죄를 피하기 위해 일단 도망치고 음주 운전을 부인하는 게 오늘날의 세태다.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사회적 사건·사고가 반복돼도 누구 하나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트랍스는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