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보도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

입력
2024.10.0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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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을 쓰러 한 행사에 다녀왔다. 지난달 27일 열린 ‘자살예방 보도준칙(옛 자살예방 권고기준)’ 공청회다. 보건복지부가 새 준칙안을 공개하고 각계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자살예방 보도준칙은 언론이 자살사건을 보도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다. 자살사건이 대중, 특히 자살 고위험군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마련한 규범이다. 이번까지 세 차례 개정을 거듭하며 보완돼왔다.

애초엔 공청회에서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다. ‘체계가 잘 갖춰진 언론사는 큰 걱정이 없다. 대개 사내에 저널리즘 규범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고 구성원들을 재교육하는 기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의 뉴스스탠다드실이 그렇다. 문제는 유튜브나 군소 매체다. 보도준칙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곳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집중적으로 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다 불현듯 기사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몇 주 전 종합일간지 중 한 곳이 포털 뉴스 편집판에 올린 기사였다. 제목에 자살 방법을 적시했기에 기억이 난다. 공인이나 유명인, 주요 사건 연루자의 사망도 아니었다. 보도준칙을 어긴 기사다. 이참에 검색을 해봤다.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종합일간지부터 경제지, 지방지까지 다양했다. 일부 매체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깨달았다. 지키지 않으면 자살예방 보도준칙은 힘이 없다. 게다가 올해로 제정 20년이다. 부끄러웠다. 여전히 언론은 문제였다. 토론자로 나간 공청회에서 반성부터 한 건 그래서다.

자살을 보통의 사건으로 생각하면, ‘투신’ 같은 단어를 제목에 쓰는 데 별 의미를 두지 않기 쉽다.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에겐 어떨까. 제목만 봐도 심장이 덜컹한다. 간신히 묻어뒀던 고통이 밀려온다.

자살로 사별한 적이 있는 이들은 안다. 그 죽음의 방식이 주는 충격에 압도돼 고인을 쉽사리 보낼 수도, 죽음을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 힘겨운 시간을 딛고 ‘애도’에 접어드는 관문은, 고인의 마지막 순간이 아닌 생애 전체로 그를 기억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보인다. 그는 무얼 좋아했던 사람인지, 그와 함께라서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인지, 그에게 감사한 건 무엇인지 되새길 수 있게 되는 순간이다. 올해 연재한 인터뷰 ‘애도’에서 만난 자살 사별자들은 그랬다.

그 애도에 접어드는 문을 가로막는 것, 그것이 자살 보도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음의 방식으로 ‘영구 박제’해버리는 일이 자살 보도다. ‘어떻게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죽은 사람’으로 일축해버리는 행위가 자살 보도다. 새 준칙안이 제1의 원칙을 ‘자살사건은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다’, 제2의 원칙을 ‘구체적인 자살 방법, 도구,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는다’로 못 박은 이유다.

기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독자다. 기자가 질문할 수 있는 근거는? 독자들의 알 권리 때문이다. 그 독자들에겐 알 권리만 있을까? 아니다. ‘모를 권리’도 있다. 그러니까 언론은 보도함으로써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기도 하지만,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조남태 언론중재위원회 전문위원의 발언이 그래서 의미 있다. 이 사안을 두고 자신의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아들이 건넨 말을 공청회에서 소개했다. “독자인 나한텐 자살 보도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귓전을 울렸다. 모든 언론이 곱씹어 볼 말이다.

새 자살예방 보도준칙안
1. 자살사건은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다 2. 구체적인 자살 방법, 도구, 장소,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는다 3. 고인의 인격과 유족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4. 자살예방을 위한 정보를 제공한다 ※ 유튜브·블로그·SNS 등 뉴미디어에서도 엄격히 준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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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