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월, 두 번째 임기를 보내던 텍사스주 연방 하원의원(공화)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가 향후 정치행보에 대한 조언을 얻으려고 그해 막 은퇴한 민주당의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아버지 부시는 안정된 하원 의석을 포기하고, 1970년 예정된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할지 여부를 물었다. 1960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되기 전까지, 존슨 전 대통령은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다. 존슨 전 대통령의 대답은 명쾌했다. "상원과 하원의 차이는 치킨 샐러드와 닭똥처럼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 조언에 따라 아버지 부시는 1970년 상원에 도전했다. 도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가 계기가 되어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유엔 대사에 지명됐고 백악관으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됐다.
한국에서는 2024년 11월 미국 선거에서 대선에만 주목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선거가 있다. 바로 의회 선거인데, 특히 뉴저지에서 한국계 최초의 상원의원 탄생 가능성이 주목된다.
'미국에서 가장 독점적이고 배타적 집단'으로 불리는 미국 상원은 6년 임기의 의원 100명으로 구성된다. 상원에서 역대 17명의 미국 대통령이 배출됐다. 그동안 미국 연방의회에서 5명의 한국계 의원이 선출됐는데 모두 하원의원이었다. 그러나 여론조사 추이대로라면, 현재 하원 의원인 앤디 킴이 4주 후 첫 번째 한국계 상원 의원에 당선될 것으로 보인다. 앤디 킴이 당선된다면, 미국 상원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에 큰 기회를 줄 것이다. 그동안 세 명의 상원의원을 보좌하면서, 필자는 미국 상원의원의 힘을 잘 알고 있다. 필자가 모신 상원의원 세 명 중 두 명은 주요 상임위원장으로 일했고, 다른 한 명은 국방부 장관까지 올랐다.
세 명의 의원 중 한 분인 리처드 루거 의원은 젊은 학생들과 전문가, 특히 해군장교와 영국 옥스퍼드대 로즈 장학생들과 빈번히 교류했다. 본인이 해군 장교이자 로즈 장학생이었기 때문인데, 교류했던 대상에는 앞서 언급한 앤디 킴 의원도 포함된다. 앤디 킴은 옥스퍼드대에서 로즈 장학금으로 국제관계 박사 학위를 공부했으며, 루거 의원 주선으로 상원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인턴으로 근무하며 앤디 킴은 미 의회가 어떻게 정부 부처와 프로그램에 자금을 제공하고 감독하는지, 각종 정책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했다. 앤디 킴은 인턴 시절 미 국무부에서 파견된 외교관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2012년 리비아 벵가지에서 발생한 이슬람 무장세력의 미 대사관 공격으로 숨진 크리스 스티븐스 대사도 포함된다.
미국 상원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독특한 제도로, 각 주를 상원의원 2명이 대표한다. 인구가 적은 주와 소수 정당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구성인데, 1913년 헌법 개정으로 상원 직선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각 주의 의회가 상원의원을 선발해 보냈다.
상원은 (찬반이 첨예하게 엇갈리지 않으면) 대부분 안건을 만장일치 동의로 처리한다. 때문에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한다. 하원에서는 다수당이 원하는 대로 법안을 통과시키지만, 상원에서는 수많은 법안이 폐기된다. 이것이 상원의 힘이다. 통과시킬 권한은 없어도, 백악관의 우선순위에 없는 대부분 법안은 상원의원 한 명이 막을 수 있는 구조다. 미국 상원의원이 세계 주요국을 쉽게 방문하고 국가원수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이 점을 인지하고, (한국 사정에 밝은) 앤디 킴이 상원에 합류했을 때 서울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전달할지 매우 신중하게 계산하고 조율해야 한다.
한편 워싱턴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는 이번 주 후반 국정감사가 실시된다. 한국계 상원의원 가능성에 맞춘 외교현안에 대한 적절한 질문이 다뤄져야 하는 자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언론을 도배했던 제 살 깎는 질문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수미 테리 사건, 국방 무관이 갑질 혐의로 조사를 받고 소환된 사건, 외교관이 직위를 이용해 로비업체에서 메이저리그 야구 티켓을 받은 사건 등일 것이다.
한미 동맹이 71년간 지속되면서, 국민들은 우리 당국이 대미 외교를 순조롭게 진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최근 별세한 박동선씨 주도로 이뤄진 50년 전의 엉성한 스캔들과 비교하면 이후 한국의 대미 로비는 개선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국익에 중차대한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시기에 드러난 한국 대사관의 매끄럽지 못한 행보는 여전히 갈 길 먼 대미 외교를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