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의 파인다이닝, 탐사 보도의 가성비

입력
2024.10.08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김치볶음밥과 봉골레 파스타가 전부인 기자가 지난 주말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정주행했다. ‘흑백요리사 : 요리계급전쟁’이다. 공개 직후 2주 연속(지난달 16~29일)으로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할 만큼 바람이 뜨겁다. 많은 요리 거물들을 출연시킨 섭외력, 명성만 봐서는 탈락시킬 수 없어 보이는 명인조차 떨게 만드는 블라인드 테스트, 만화로 요리를 배웠다는 '흑수저' 출연자들의 사연 등 몰입 요소가 넘친다.

프로그램이 뜨면서 '파인다이닝'이라는 낯선 용어도 주목받았다. 실력이 뛰어난 셰프가 최고급 재료로 만든 음식을 최상급 서비스와 분위기로 제공해 잊지 못할 미식 경험을 안기는 식당을 뜻한다. 세계적 권위의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3 스타'를 받은 ‘모수’의 안성재 셰프 등 흑백요리사 심사위원과 출연자 다수가 파인다이닝 식당을 운영한다.

한 끼에 비싸게는 수십만 원씩 받는 파인다이닝 식당은 사실 재무적으로 보면 남는 장사를 하기 어렵다고 한다. 업계에 따르면 이 식당들의 마진율은 약 5%.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팔면 사장 주머니에 1만 원쯤 들어온다는 얘기다. 인건비와 식재료, 임차료 등에 큰돈을 써야 해서다. 그래서 망하는 식당이 많다.

파인다이닝의 현실에 더 관심이 간 건 언론사의 탐사∙심층기획 부서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가성비를 떠나 품질 높은 '작품'을 선보이는 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결이 같다. 탐사 보도 부서는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6개월 넘게 한 주제를 취재, 보도한다.

하지만 많은 파인다이닝 식당이 사라지듯 전통 미디어의 탐사·기획 부서들도 최근 없어지거나 인력이 주는 추세다. '가성비의 덫'에 걸려서다. 뉴스를 찾아 읽는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 언론사가 페이지뷰(독자들이 기사를 본 횟수)를 그나마 확보하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기자가 매일 시의성 있는 많은 뉴스를 눈길 가는 제목으로 쏟아내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멀리보면 파인다이닝이나 탐사∙기획 보도 부서의 가성비는 달리 평가받을 여지가 있다. 파인다이닝은 그 나라 고급 음식 수준의 끝을 보여준다. 안 셰프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외국인 손님이 '(당신의 음식으로) 한국 외식 문화를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파인다이닝이 한식의 고급화와 세계화에 첨병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들이 선보인 창의적 요리법 등은 업계 전반에 천천히 퍼져 음식 산업 자체를 더 매력있게 만들어 준다.

탐사∙심층기획 보도 조직 역시 뉴스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오랫동안 품들여 취재해 이용자가 푹 빠져 읽을 수 있도록 쓴 뉴스 콘텐츠를 꾸준히 내놓는다면 좁게는 한 언론사, 넓게는 언론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테다. 언론은 탄탄한 신뢰자본 위에 서야 지속가능한 산업이다. 또, 실험적 취재나 기사 작법은 언론계에 영감을 줄 수 있다. 여러 업보 탓에 대중적 불신이 크지만 우리 언론계에는 여전히 질 높은 취재, 보도를 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기자들이 적지 않다.

기왕 꿈꾼다면 잿빛보다는 장밋빛 미래가 좋겠다. 언론학자들이 뉴욕타임스나 BBC, 가디언 같은 해외 언론이 아닌 우리 언론의 보도를 좋은 탐사 보도의 전형으로 소개하는 날이 오길.

유대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