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이 국가를 믿어도 되나?

입력
2024.10.10 00:01
27면

얼마 전 지하철 승강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젊은이가 다가와 급하게 전화를 걸 일이 있는데 핸드폰을 두고 왔다며 내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상한 앱을 깔아서 해킹을 하지는 않을지, 핸드폰을 들고 그대로 도망가지는 않을지, 내가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순간을 스쳐가는 많은 생각 와중에도 거절을 못해 마지못해 핸드폰을 건넸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그의 옆에 딱 붙어 지키고 서 있었는데 청년은 짧은 통화를 마치고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이번은 운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나의 빈약한 신뢰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서울대, 인하대, 그리고 초중고생들까지 번진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은 범인들이 동문 여성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프로필 사진 등을 몰래 가져다 성적인 장면으로 합성한 다음 텔레그램으로 유포하는 방식이었다. 채팅방 이름 중에 ‘지능방’은 ‘지인능욕방’, ‘겹지방’은 ‘겹치는 지인방’의 준말로 서로 겹치는 지인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욕보인다. 직장 동료, 동문,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등 지인의 사진에 신상정보를 같이 올리고, 성희롱성 글을 붙이거나 사진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대상자를 성적으로 비하하고 이를 다수가 소비하는 ‘지인능욕’이 횡행한다. 해외 보안업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딥페이크 피해자 중 53%가 한국인으로 세계 최다이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우리나라를 딥페이크 공화국이라 부른다. 지인을, 동료를, 친구를 믿어도 되나? 혹시 나도 모르게 내 사진을 합성해서 온라인상에서 능욕하지는 않을까? 이 심각한 신뢰위반 사건은 우리가 사회에 대해 갖는 긍정적인 기대치를 무너뜨렸다.

사적인 신뢰만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신뢰도 위태롭다. 민간인이 하는 ‘사적 제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9월 22일 새벽 광주광역시에서 ‘음주 운전 추적’ 유튜버를 피해 달아나던 30대 남성 운전자가 대형 트레일러를 들이받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스스로를 ‘광주 보안관’이라고 부르는 유튜버 A씨는 마치 경찰처럼 거리에 잠복해 있다가 술을 마신 것으로 의심되는 운전자를 추적해서 응징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며 유명세를 얻었다. 지난 1월에는 한 유튜버가 60대 경비원을 폭행한 10대 남학생을 붙잡아 무릎 꿇게 한 뒤 욕설을 하는 영상을 올렸는데, 조회 수가 34만 회에 달했다. 이 영상들에는 “경찰 대신 시민들이 범죄자를 잡아 통쾌하다”는 댓글들이 달린다. 성범죄자 조두순 집 침입 및 폭행, ‘밀양 성폭행 사건’과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 신상 공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 신상정보 공개 등 민간인이 ‘정의를 구현한다’며 나선다. 드라마도 사적 제재물이 인기인데, <모범택시> <더 글로리> <살인자ㅇ난감> 등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은 민간인의 통쾌한 복수와 응징으로 이어지고, 이는 대중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공권력이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불신, 그래서 우리가 나서서 보복하고 제재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시민의 얕은 신뢰를 보여준다.

사람 간의 사회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힘이 곧 정의로 통하는 정글의 법칙이 득세하는 절벽 끝에 우리 사회는 서 있다. 이 사람을, 이 국가를 믿을 수 있나.




정회옥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