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동원돼 강제 노역한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5일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6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김 할머니가 전날 오후 경기 안양시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됐다. 6학년 때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 교사의 꾐에 넘어간 것이다. 김 할머니는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철판 절삭 공정에 투입됐다가 왼손 검지 손가락이 잘렸고,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당시엔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발목을 크게 다쳤다.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며 노역에 투입된 김 할머니는 1945년 광복된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결혼해서도 남편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구박을 듣는 등 평온한 생활을 가져 보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2020년 구술기록집 '배고픔에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하얗게 핀 가시나무 꽃 핥아먹었지'를 통해 "내 평생 가슴 펴고 큰 길 한번 다녀 보지 못하고, 뒷질(뒷길)로만 뒷질로만 살아왔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도움으로 2012년 10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법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년여 만인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후 미쓰비시 측은 배상 이행을 거부했고, 지난해 3월 정부가 강제 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자 김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다가 사죄를 받고, 어디다가 (사죄) 요구를 (해야) 하겠느냐"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정부의 회유 등을 이유로 지난해 5월 정부에서 대신 지급하는 이른바 '판결금'을 수용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안양장례식장, 발인은 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