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란, 민생파탄, 구한말인가

입력
2024.10.04 18:30
18면
고종·명성황후 시대 연상되는 권력암투
‘김옥균 프로젝트’ 의심 끊이지 않는 여권
尹대통령이 바로 서야 ‘비선공간’ 차단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관리들의 횡포와 실정에 참다 못한 농민들이 동학혁명을 일으켰다. 정치는 부패하고 무능했다. 외척세력이 발호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민생은 파탄났고 나라 살림이 거덜났다. 밖으로는 외세의 틈바구니 속에 국격은커녕 망국의 벼랑에 내몰렸다. 이 와중에 내부개혁 시도가 번번이 좌초돼 미래를 대비할 엘리트군은 씨가 말라 갔다.

조선왕조는 결국 일왕가(家)의 귀족 파벌이 돼 명맥을 이었다. 영친왕(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은 일본 궁내청의 막대한 예산으로 1년간 호화로운 유럽여행을 다녔다. 이들이 불편한 호사를 누리는 동안 일본에 있던 동포들만 해도 간토대학살(1923년)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현대 국가에서도 정치가 타락할수록 국민은 비극에 빠지게 된다. 요즘 구한말 고종-명성황후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이 필자만인가. 이상하리만큼 비슷하다. 국민 눈치를 개의치 않는 집권세력은 내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두 달 반 전 국민의힘 전당대회부터 난데없이 '김옥균 프로젝트'가 나돌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황태자에서 돌연 반윤이 된 한동훈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친윤계의 방해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날 것이란 내용이다. 누구 작품인지 이름을 고약하게도 지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로 수구파를 척결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3일 천하’로 끝났다. 수구파는 민씨 일가가 중심이었다.

김옥균의 최후를 알고 있다면 끔찍한 발상이다. 그런데 한동훈 대표의 요즘 처지를 보면 실제 여권 전체가 과거 시대에서 암투를 벌이는 듯하다. 독대(獨對)를 줄기차게 요청하고 대통령은 국민이 관전하는 가운데 거부 중이다. 사전에선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이라고 정의한다. 듣기 싫은 '민심 전달'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대통령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혹여 왕조시대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나라 전체가 영부인 문제를 입에 올리고 있다. 정치권과 재계 및 관료집단, 일상의 국민 어디서나 김건희 여사가 화두로 등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인물은 집권당이 총선 승리를 위해 영입한 김경율 회계사였다. 이런 민심각성 충격요법도, 4월 총선 참패로도 바뀐 게 없다. 국정 어느 분야든 내용이 뭔가 꺼림직하면 어김없이 김 여사 배경설이 나도니 없는 얘기도 창작될 지경이다.

발언과 태도에서 대중이 그렇게 느낀다면 김 여사 본인이 원인일 것이다. 계속 드러나는 당무·공천개입 의혹과 논란, 그리고 '전화 정치'는 숱한 전조 현상이 있었다. 지난 7월 윤 대통령과 방미 당시 탈북민 행사에서 김 여사는 "북한을 변화시키도록 저와 우리 정부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최재영 목사 면담 영상에 "이제 남북문제에 제가 좀 나설 생각"이란 대목이 나오는가 하면,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참석 후 귀국한 윤 대통령이 공항에서 김 여사와 공식 악수하는 희한한 의전 사진도 있다. 추석 연휴 직전 '현지 지도 사진'으로 불린 마포대교 시찰은 한국 유권자가 영부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건지 착각마저 일으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통제할 사람은 현재로선 윤 대통령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정현안을 좀 더 깊이 있게 챙기고 몰두해 어떤 비선실세도 생겨날 여지를 줘선 안 된다. 권력공백이 있으니 누군가 들어오지 않겠나. 그 대상이 누구든 '국정농단'이란 키워드가 시중에 거리낌없이 등장한다면 국민과 국가는 힘들어진다. 탄핵을 거론해도 역풍이 불지 않는 현실에 용산은 긴장해야 한다. 구한말과 '박근혜 시대'를 떠올리는 국민이 더 많아지기 전에 윤 대통령이 지금 바로 서야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박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