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월 말, 싱가포르 게일랑 바루 58블록 공공임대주택에 뜬금없는 편지가 도착했다. 춘절(중국식 음력 설) 기념 카드였다. '뭐든 기념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조금 불쾌한 기분으로 카드를 펼쳤다. 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이제 자식은 가질 수 없겠네? 하하하" 네 아이를 무참히 잃은 지 2주 만이었다. 발신인은 조롱하는 듯 서명마저 남겼다. '살인자'. 가족과 가까운 사람임을 단박에 확신했다. 부부의 내밀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세기 가까이 '살인자'의 발자취를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것, 그 겨울 일어난 '게일랑 바루 탄 가족 살인사건'이 싱가포르 최악의 미제사건 중 하나로 남으리라는 것을.
1979년 1월 6일이었다. 남편 탄쿠엔차이(36)와 아내 리메이잉(37)은 여느 때처럼 오전 6시 35분에 집을 나섰다. 남편은 미니버스 운전사로, 아내는 검표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세 아들 탄콕펑(10)·탄콕힌(8)·탄콕순(6)과 유치원생 막내딸 탄친니(5)를 키우려면 맞벌이 수입이 필요했다. 이른 시간 출근하면서 곤히 잠든 아이들을 깨울 순 없었지만, 집을 나선 지 40분쯤 지나면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소리에 깬 아이는 졸린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형제자매를 깨워 함께 등굣길에 오르곤 했다.
그날 오전 7시 10분에도 리메이잉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이나 걸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다. '너무 깊게 잠들었나…' 네 번째엔 이웃에게 전화했다. 집 문을 크게 두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이 오늘따라 못 일어난 것 같다고. 이웃은 부탁대로 현관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일이 여유로워진 오전 10시. 부부는 찜찜한 기분으로 집에 들렀다. 부엌을 지나쳐 집 안을 가로지를 때까지도 리메이잉은 불길함의 정체를 몰랐다. 그러나 화장실을 쳐다본 순간, 정신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사남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네 아이가 피투성이 주검으로 화장실에 누워 있었다.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경찰 사이먼 수파이아는 훗날 "나는 경찰 경력을 통틀어 네 명의 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살해당한 건 한 번도 못 봤다"고 회고했다. 화장실 구석구석이 피투성이였고, 바닥에 깔린 첫째부터 맨 위의 막내까지 네 아이의 시신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든 아이가 각각 머리, 얼굴, 팔 등을 흉기로 최소 20번가량 찔리고 베인 상태였다. 특히 범인과 사투를 벌인 듯한 첫째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한 사람당 수십 개나 되는 상처 개수는 통상적인 살인 피해자보다 훨씬 많았다. 분노의 흔적으로 보였다. 겨우 유치원을 마칠까 말까 한 어린아이 넷이 이만 한 원망을 샀을 리 없었다. 집은 어질러져 있지도, 귀중품이 없어지지도 않았다. 범행 동기에 대한 추측은 자연스레 '부모에 대한 원한'으로 모였다.
살인자는 부모의 지인일 뿐 아니라 집에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즉 아이들이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경찰은 추측했다. 현관문에는 강제 개방이나 침입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사망 시각은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로 추정됐다. 6시 35분쯤 출근하고, 7시 10분쯤 집에 전화한 부부의 일정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한 범행 시간이었다. 범인은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2주 뒤 날아든 중국 춘절 카드는 이 추측을 굳혔다. "이제 자식은 가질 수 없겠네, 하하하. -살인자" 리메이잉은 막내딸 탄친니를 낳은 뒤 불임 수술을 했다. 널리 알릴 필요가 없는 개인사였으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부의 속사정까지 아는 가까운 지인이라는 확신이 섰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사건 발생 8일 만에 떠오른 인물이었다. 한 택시기사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기사는 그날 아침 8시쯤 범죄 현장 부근인 칼랑 바루 로드 96블록에서 비틀대며 걷던 한 20대 남성을 태웠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남자…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이상함을 느낀 기사가 핏자국이 왜 생겼냐고 묻자 그는 "누가 날 때렸다"고 얼버무렸다.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던 기사는 남자의 바지 허리춤에 칼자루가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택시에서 내릴 때는 칼날이 문에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도 들렸다.
부부는 남자의 인상착의를 듣고 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말레이시아계 이웃이었다. 집 전화를 빌려 쓴다며 거의 매일 가족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를 만큼 친근하게 여겼다. 경찰에 붙들려 온 그를 보고, 택시기사는 자신이 태운 사람이 맞다고 확인했다.
부부를 잘 알고, 그 집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건 직후 칼을 갖고 핏자국이 묻은 채 목격된 이웃. 그가 범인이라면 모든 게 설명됐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기사의 증언이 전부라는 것. 물증은 하나도 없었다.
단서가 많았던 현장이지만, 1979년의 기술력은 한계가 너무나 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당시는 싱가포르 경찰이 범죄 현장 포렌식 조직을 창설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과학수사는 걸음마 수준으로, 혈액 샘플이 있어도 기껏해야 혈액형 정도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폐쇄회로(CC)TV는 아파트에 한 대도 없었다.
현장에는 분명 눈에 띄는 증거가 있었다. 살인자에게 격렬히 맞선 듯 시신이 크게 훼손된 첫째 탄콕펑은 뜯겨나간 머리카락 한 움큼을 꽉 쥐고 있었다. 범인의 것이라면 '스모킹건'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물이었다. 부엌 싱크대에 남은 핏방울도 주목할 만했다. 화장실을 제외한 집 전체가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싱크대에만 피의 흔적이 있었다. 범인이 혈흔을 씻어내려 시도한 듯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력으로는 머리카락도, 혈흔도 유전자정보(DNA) 검사가 불가능했다. 당시 경찰은 그 머리카락이 탄콕펑 자신의 것이라고 밝혔지만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면 이웃이 들었을 텐데, 범행의 재구성에 도움을 줄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살던 한 노년 여성은 자주 문간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범행 시각에 하필 머리를 감던 중이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범행을 부인하던 이웃 남자는 풀려났고, 머지않아 이사를 떠났다.
그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부부의 친구, 친척, 이웃을 비롯해 100명 이상을 심문했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리메이잉이 금전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거나, 부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등 무성했던 소문도 일일이 들여다봤지만 어떤 소문에 대해서도 사실이라는 증거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영원 같던 고통의 순간을 뒤로하고 부부의 시간은 흘렀다. "더 자녀를 갖지 못할 것"이라던 카드 속 저주는 빗나갔다. 아내는 불임 수술을 되돌렸고, 부부는 이후 두 자녀를 뒀다. 싱가포르 언론은 2021년 이들의 근황을 전했다. 탄쿠엔차이는 이미 사망했고 리메이잉은 손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들의 옛 이웃이 수사기관에 새로운 사실을 제보해 수사가 재개됐다는 것이었다. 제보 내용과 수사 진척 상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사건이 해결되기를 염원하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수십 년이 지나 사건과 관련됐던 사람이 하나둘 세상을 뜨는 지금, 이번이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45년. 열 살 남짓 어린이가 성인으로 자라 10대 자녀까지 두기에도 넉넉한 세월이다. 그러나 그 옛날 꼬마였던 아이들은 유치원 졸업사진으로, 그마저 없는 막내는 아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석 속에 붙박여 있다. 아직까지도 묘비 위에는 새로운 장난감이며 꽃이 놓이곤 한다. 죽은 아이들을 알기는커녕,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본 적 없는 이들마저도 이곳을 서성인다. 수십 년 전 잠든 누군가의 묘지로 생면부지 타인을 이끄는 그 힘은 무엇일까. 아마 어른이 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애달픔, 그리고 미완의 정의를 향한 끝없는 갈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