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 이 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오른편에는 큰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연못 춘당지가 있다. 이 연못을 따라 걷다 보면 ‘대온실’이 등장한다. 궁의 다른 건물과는 달리 투명하고 새하얀 근대식 유리온실이다. 한 발 들어서는 순간, 바깥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빨아들이는 이 온실로부터 소설가 김금희의 첫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쓰였다.
대온실은 일제가 훼손한 창경궁을 1983년 복원하는 과정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이 철거될 때도 살아남았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유리온실이자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아서였다. 이제는 모든 건물이 빈집이 되어버린 고궁에서 “원래 쓰임새대로 있는”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서 건축사사무소의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 담당자로 일하게 된 ‘영두’는 작업 장소가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에 덮인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가 창경궁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궁의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 원서동을 꺼리는 건 중학생 때의 기억 때문이다.
인천 석모도에 살던 중학생 영두는 외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낙원하숙’의 주인 ‘안문자’ 할머니를 떠올린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을 하러 간다. 하숙집에서 문자 할머니의 손녀 ‘리사’와 같은 방을 쓰며 강남의 학교에 다니던 영두는 모종의 사건을 겪고 석모도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끝내 아버지도 잃은 그는 가족 같은 친구 ‘은혜’에게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영두에게 원서동 낙원하숙은 오랜 망각의 대상이었다.
백서 기록 업무를 거절하려던 영두는 은혜의 초등학생 딸 ‘산아’의 “나는 모르겠으면 그냥 하거든”이라는 말에 자신 역시 일단 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대온실 보수공사 실측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이 발견되면서 그의 수리 보고서는 1909년의 창경궁 대온실 공사 책임자인 일본인 ‘후쿠다 노보루’의 회고록과 연결된다. 후쿠다는 실존 인물 ‘후쿠바 하야토’를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해낸 캐릭터다. 그를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엮인 과거들과 오늘날의 사람들로 향하는 영두의 시선은 김금희의 소설 속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건조하고 담담하다.
이는 “너무 마음이 아프면 외면하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어른’의 시선이다. 그럼에도 ‘너무’ 아팠던 시간을 지나 창경궁과 그 동네를 마주한 영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처와 대면한다. 대온실 지하 공간을 대하는 그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땅 밑이 복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묻어 버린다면 결국은 ‘허술한 수리’에 그친다고 여긴 영두는 그 모두를 기꺼이 껴안는다.
김 작가 특유의 “어떤 정념에도 붙들려 있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기력이나 냉소에 함몰되지도 않는, 이 초연하고 성숙한 힘”(강지희 문학평론가·‘잔존의 파토스’)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서도 여전하다. 이 힘의 근원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소설보다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는 걸 깨달았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두가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던 곳이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의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별처럼 느껴지는 집”으로 낙원하숙을 여기게 된 것도 예전엔 받아들이지 못했던 누군가의 진심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이해가 비록 극적인 화해나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적막하게 불행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을 조금씩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김 작가의 소설은 말한다.
김 작가는 “여러 번 의의를 달리한 끝에 잔존한 창경궁 대온실은 어쩌면 ‘생존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도 이해되기를”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