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왜곡한 주범은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다. 이 영화는 북극 바다 얼음이 녹아 바닷물 염분이 줄어들면서 대서양의 해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미국 동부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게 잘못됐다. 어떻게 빙하기가 한 달 만에 오는가.
기후 변화는 ‘느린 재난’에 가깝다. 사회경제적 환경을 투과해 고통을 배가하고 절망에 빠지게 한다. 방글라데시 저지대의 농민은 해수면 상승으로 집이 수몰돼 긴급 구조를 외치지 않는다. 높아진 지하수 염분으로 흉작이 잦아져 가족 부양을 위해 도시로 나가 빈곤층이 된다. 이것이 기후변화다.
‘기후 변화가 전부는 아니다’는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기후 담론의 한 양상을 포착한 책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기후 환원주의’를 겨눈다. 미래를 지구 온도나 이산화탄소 농도 같은 숫자로 정해 시간 부족이 지배하는 담론이다. 이에 따라 “위험할 정도로 근시안적 관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10%도 안 되는 한국 상황에서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기후 환원주의는 정부와 기업 전 부문에서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 장치로 이용된다. 환경부가 댐 건설 정책을 부활해 전국에 기후대응댐 14개를 짓겠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 부족 재앙이 닥치니, 시급히 댐을 지어야 해’라는 논리다.
이 책은 “현재 추세대로 이어질 경우”라면서 특정 기후 변화 시나리오를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언론 관행도 지적한다. 언론이 즐겨 쓰는 기후 변화 시나리오(RCP 8.5)는 이번 세기말 최대 5.7도가 오르는 경우를 상정한다. 이대로라면 세기말 석탄 사용량이 5배 늘고, 탄소 배출량은 2050년 현재 수준의 두 배에 이른다. 선진국이 이미 에너지 전환 대열에 뛰어든 지금 상황을 감안하면 현실화 가능성이 높지 않은 시나리오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으냐’며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0년 동안 화석연료에 판돈을 걸어 한몫 잡은 이들은 지금 재생에너지 기술로 새로운 좌판을 깔려고 한다. 기후 환원주의는 동시에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뿌리고, 우주에 거울을 설치하고,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를 포집하자는 기후공학 기업과 자본에 세금을 지원하도록 한다. 그게 우선일까. 그 돈은 느리고 힘들지만, 풍력·태양광 발전소를 짓고, 난방 연료가 없어 추운 밤을 보내는 개발도상국 주민에게 발전소를 지어주는 데 쓰면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만난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는 기후 환원주의 비판이 ‘허수아비 때리기’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류 멸종이나 대재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개 국가와 기업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1980년대 이후 각국 정부의 태도를 바꾼 과학자들, 환경단체 그리고 미래 세대 청소년들이 있어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기후 변화 초심자는 이 책을 읽을 때 조심하기를 권한다. 전체 퍼즐의 일부를 전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을 작가에게 되돌려준다면, ‘기후 환원주의’ 또한 전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