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이자 사상가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구토'(1938)는 당대 최고의 독일 철학자였던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웬만한 이론서보다 현상학을 잘 설명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건이 아니라 사유 중심이라 텍스트가 좀 난해한 게 단점이다. 영적이고 비의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 난해함을 풀어내는 즐거움에 중독된 독자라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을 찾기도 쉽지 않다. 사르트르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자 출세작이다.
소설은 일기체이다. 1910년에 발표됐지만 1925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받은 영향도 엿보인다. 공간 배경은 사르트르가 고등학교 교사로 지낸 르 아브르이다. 인상파 화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항구도시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가 그린 ‘해돋이’(1872)가 그곳 풍경이다. '구토'의 시간 배경은 그로부터 65년 정도 지난 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이다. 소설 속의 도시 이름은 부빌(Bouville)로, 번역하면 '진흙도시'란 뜻이다. 겉보기에는 깔끔한 부르주아의 도시이지만 이름은 진흙탕이다. 이면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름과 의미가 엇갈리는 부조리는 등장인물에게도 드러난다. 주인공이며 화자인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이름은 한국식으로 하면 '강철수' 정도의 느낌이다. 앙투안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역사적으로도 가장 많이 사용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로캉탱이라는 성은 ‘돌 같은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작가의 창작이다. 전체 뜻으로 보면 ‘소중한’(앙투안) ‘바위 같은 인물’(로캉탱)이다. 그러나 그가 쓴 일기를 보면 그 누구에게도 ‘소중한 인물’이 아니고 바위처럼 진중하거나 무거운 인물도 아니다. 우울증에 신경증까지 보일 뿐 아니라 생각의 변화도 심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 소설 같은 면도 있다. 그러니 어떤 맥락 속에 우연히 등장하는 존재자에게서 존재를 느끼는 순간 깨달음으로 통하는 구토증을 느꼈을 것이다.
한국어 제목인 ‘구토’는 실존주의자들의 용어인 ‘부조리’처럼 직설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구토가 아니라 메스꺼움이나 욕지기에 가깝다. 프랑스어 제목인 '라 로제(La Nausée)'의 어원을 추적해 보면 뱃멀미에서 나온 말이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부조리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메스꺼움이다.
구토증이 생기는 이유는 우연히 만난 어떤 존재자에게서 존재를 느끼면서 인식의 부조리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순간적으로 강력한 전류가 되어 흐르고 몸은 욕지기를 느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불안이고, 현대 한국인의 표현으로 보면 '현타'가 온 것과 비슷하다.
'구토'의 주인공이 처음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느낀 대상은 돌멩이였다. 로캉탱이 바닷가에서 돌멩이를 들었다가 욕지기를 느낀다. 그는 물수제비를 뜨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돌에 손이 닿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도구로써의 돌멩이(존재자) 이상의 그 무엇(존재)임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존재자는 일시적인 모습이고 존재는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면목이다. 존재자가 우연한 일면이라면 존재는 전면적인 모습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존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주변에서도 존재자만 보고 느낄 수 있다. 존재 그 자체는 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떤 존재가 드러내는 수많은 존재자의 모습을 통해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은 주종관계를 뒤흔든다.
우리는 삶을 기억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지만 세월과 함께 이야기가 축적되면서는 이야기가 우리 삶을 규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사용하게 된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럴듯한 것(존재자)일 뿐 우리의 삶 그 자체(존재 또는 진실)는 아니다. 존재는 변치 않지만 존재자는 수없이 다르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화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앙투안 로캉탱은 그래서 부조리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대화를 두려워해서 피하려 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는 모두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도구를 잘 모시게 되지 않았는가. 생존을 위한 농사일이나 가축을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벼나 밀, 옥수수는 자신의 씨앗을 먹게 해 주는 대가로 인간을 부려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식물이 됐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축도 마찬가지다. 존재자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근본적인 존재의 문제를 착각할 수밖에 없다.
지구를 뒤덮은 벼나 밀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이야기로 뒤덮여 있다. 로캉탱은 이처럼 진실이 사라지고 그럴듯한 이야기에 둘러싸여 이야기가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욕지기를 느낀다. 그래서 진실이 아니라 진실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찬 도서관에서도 구토증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이해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비의적인 텍스트들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은 부르주아의 세상이 왜곡과 부조리의 온상이라고 보는 냉소적인 프티 부르주아이다. 그에 따르면 신고전주의 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회화마저도 부르주아들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왜곡하며 그들의 지배에 일조하는 것들이다. 사르트르는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부빌의 지배층 부르주아들의 초상화가 잔뜩 전시된 박물관 이야기를 길게도 늘어놓는다. 그런 다음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클 뿐 아니라 ‘위인 소사전’에도 등장하는 부빌 출신 올리비에 블레비뉴 의원의 위풍당당한 초상화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을 지적한다. 그의 초상화 옆에는 키가 큰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두 사람의 키는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블레비뉴 의원의 그림 속에는 키가 작아 보이게 할 위험이 없는 물건들만 배치되어 있었다. 뭔가 왜곡되었다는 짐작에 따라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블레비뉴 의원의 키는 겨우 153㎝였다. 그에 대한 풍자가의 글에 따르면 그는 키 높이 고무 깔창을 사용했으며 그의 부인은 그보다 두 배쯤 컸다. 참고로 블레비뉴 의원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구토'에서는 주인공이 블레비뉴 의원을 한껏 조롱하지만 사르트르의 키도 딱 그 정도였다. 평생의 연인이었던 시몬드 드 보부아르는 그보다 10㎝ 정도 컸다. 소설 속 인물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런 신체적인 콤플렉스를 일찍 극복했다. 작은 키를 굳이 감추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적 능력이 존재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구토증을 유발하는 세상에서 실존적 불안과 혐오감을 느끼면서 대화까지 단절하고 살아가는 앙투안 로캉탱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섹스였다. 상대의 육체에 깊은 애정을 가지는 시간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 소설 원고에는 매우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성적 묘사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삭제됐다.
'구토'는 주인공을 되풀이해 위로해 주는 재즈곡으로 마무리된다. 곡 제목은 '머지않아(Some of these days)'이다. 사르트르는 쇼팽의 곡에서 위안을 구하는 사람들을 멍청이들이라고 욕하면서 재즈에 대해서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소설에는 재즈 곡이 하나 더 등장하는데,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내가 사랑한 남자'이다. 곡이 쓰인 사연은 이렇다. 앙투안 로캉탱이 집필을 포기한 날이었다. 손바닥을 칼로 째면서 시작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환상 속에서 거리를 헤매다가 술집인 ‘바 드 라 마린’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는 이 곡을 들으며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사르트르는 재즈 곡에 대해 과할 정도의 애정을 보여준다. 화자는 그 이유를 철학적인 개념까지 동원하여 구구절절 설명하지만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재즈는 하층민의 문화였으며 연주자의 자유로운 해석과 표현이 생명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