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임금도 봤을까... 아름다운 음악 같은 태곳적 산수화

입력
2024.10.05 10:00
<148> 영남 광동 ⑩사오관 단하산, 주기고항

지구는 약 2억 년 전부터 퇴적과 침식을 거듭했다. 조산운동으로 지형이 뒤틀리고 끊어지는 현상이 무한 반복됐다. 붉은 사암이 표면에 드러나 절경을 연출했다. 지구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중국에도 1,000곳이 넘는다. 2010년 8월 전국 6개 성에 분포된 풍광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 지질학 석사 출신 펑징란이 1928년 단하산(丹霞山)을 찾았다. 처음으로 단하지모(丹霞地貌)라 불렀다. 사오관 런화현(仁化縣)에 위치한 단하산으로 간다.

수미인, 양원석, 승모봉, 납촉봉... 유네스코 세계유산 단하산


관광버스를 타고 돤스촌(斷石村)으로 간다. 산을 휘감고 흐르는 금강(錦江)을 건넌다. 강을 따라가며 기암괴석을 둘러보는 유람선이 떠다닌다. 부두 뒤로 웅장한 암반이 드러난다. 평범해 보였는데 잠자는 미인, 수미인(睡美人)이란 이름이다. 공중에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30분가량 걸어가니 느닷없이 야릇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등장한다.


미인이 옆에 누웠으니 희한한 바위가 생겼을까? 남성 성기와 비슷한 양원석(陽元石)이다. 몸체 봉우리는 양원산이다. 발기 상태의 음경에 혈관과 음모까지 그럴싸하다. 일부러 조각하지 않았다. 지질학자들은 약 30만 년 전부터 꼿꼿했다고 한다. 자연은 참 위험한 조각가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물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소개하고 있다.


붉은 퇴적물이 차례차례 쌓이다 압력을 받아 암반층이 된다. 점점 암반이 높아지면서 사이사이에 틈(절리)이 생겨난다. 하필이면 암반 일부가 붕괴해 떨어져 나간다. 동시에 침식도 일어난다. 풍화까지 이어지며 지금의 모양으로 변모했다. 높이 28m에 지름 7m다. 계단 따라 올라가니 전망대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첨정발재(添丁發財)라 적은 공덕 상자가 있다. 아이를 낳는다는 첨과 사내아이 정이다. 올라온 사람 중 왜 여성만 기도하는지 모르겠다. 향을 파는 할머니도 여럿이다. 신의 은총에 답례하는 답사신은(答謝神恩) 현수막이 걸려 있다.

19금 암석을 관람하고 나와 다시 관광버스를 탄다. 10분 이동해 보주봉(寶珠峰) 오르는 케이블카를 탄다. 금강 물줄기가 길게 보인다. 단하산을 벗어나 정강(湞江)과 합류한다. 광저우 부근까지 남하하는 북강(北江)을 거쳐 주강(珠江)에 흡수된다. 남쪽 바다까지 달려간다. 옥처럼 맑은 물결은 남쪽으로 갈수록 탁하게 변한다. 멀리 시선을 옮기니 흐릿하게 봉우리가 이어진다. 금세 장벽 같은 봉우리를 넘는다.

등산로를 따라 걸어간다. 일출과 일몰 모두 아름답다 하는 소음정(韶音亭)에 도착한다. 4,000년 전 순임금이 궁정 음악인 소악(韶樂)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소’는 아름다운 악곡이며 풍류를 뜻한다. 단하산까지 오진 않았을 터인데 임금이 머물던 자리를 소석(韶石)이라 불렀다. 나중에 2층 정자를 지었다. 풍광이 신비하니 전설이 빠질 수 없다. 날씨가 조금 흐린데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나름 선명하다. 자연이 제멋대로 빚었는데도 한 폭의 산수화로 완벽하다.


정자를 내려가 전망대 끝으로 간다. 잘 보이지 않던 승모봉(僧帽峰)이 나타난다. 유난히 높이 솟았다. 보고 또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입구 대문과 유네스코 표지판도 승모봉으로 꾸몄다. 거대한 암반 끝 오른쪽으로 촛대처럼 생긴 납촉봉(蠟燭峰)이 보인다. 흐린 탓에 보일 듯 말 듯 윤곽만이다.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눈길만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단하산의 기운을 긴 호흡으로 가슴에 품는다. 다시 오면 쾌청한 날씨를 보여달라고 빌어본다.

185 성씨의 가문 자랑, 주기고항

동쪽으로 90㎞ 떨어진 난슝(南雄)으로 간다. 광둥 최북단이다. 명나라는 건국 후 영남 일대에 10곳의 관부(官府)를 설치한다. 그중 하나가 광주부(廣州府)다. 현재 광저우를 비롯해 주강삼각주 일대 약 7,000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광부인(廣府人)이라 부른다. 조상이 살던 원적지가 있다. 광둥제일항이라는 주기고항(珠璣古巷)으로 간다. 난슝에서 북쪽으로 10㎞가량 떨어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패방이 파란 하늘과 함께 나타난다.

당나라 시대에 조성돼 송나라에 이르러 번창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했다. 남쪽 강역으로 가서 척박한 땅을 개척하고 해외로 사방으로 나아갔다는 조각상이 보인다. 온 가족이 수레를 끌고 소를 타고 개, 돼지, 닭, 양을 이끌고 가는 장면이다. 노를 젓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조각상도 있다. 열병과 환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만대에 이르는 업적을 남겼다는 제목이다. 몇몇 성씨만의 집성촌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성씨가 살았다. 이들은 원래 어디서 왔을까?


남천성씨명록(南遷姓氏名錄)을 보니 알겠다. 남천해, 여기에서 살던 성씨가 185개다. 당호(堂號)와 함께 출신을 기록하고 있다. 맨 아래 칸에 본인의 성씨인 최씨(崔氏)도 있다. 산둥 취푸에서 와서 박릉당(博陵堂)에서 살았다. 다른 성씨도 최씨 가족처럼 중원에서 이주했다. 살기 위한 도피였다. 당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도망했다. 북송과 남송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족이 북송 황제를 사로잡고 멸망시켰다. 몽골족은 남송을 초토화시켰다. 오령을 넘어 영남으로 도주해 왔다.

주기고항은 원래 경종항(敬宗巷)이었다. 당나라 14대 황제의 시호와 같으니 쓸 수 없었다. 황제가 주기조환(珠璣絛環)이란 칭호를 하사했다. 주옥이 줄줄이 고리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마침 적당한 이유가 있었다. 무형문화재 전시관인 광부인가훈관(廣府人家訓館)으로 간다. 아이 둘이 재롱을 떨고 어른들이 바라보고 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있다. 지팡이를 짚은 이도 둘이다. 관모 쓴 이가 한 노인을 부축하고 있다. 장창(張昌) 칠세동당(七世同堂)이라 적혀 있다. 증조부와 증손자까지 7대가 함께 사는 집을 말한다. 매우 드문 일이라 황제가 축하를 보냈다. 마을 이름이 될만했다.

종사(宗祠)를 짓기 시작했다. 지도에 동그랗게 표시된 성씨가 수두룩하다. 오래된 사당도 있지만 새로 짓기도 한다. 그냥 종사가 아니라 대부분 대종사다. 크게 모셨고 위대하다는 자랑이다.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쟁이다. 너무 많아 다 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향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방문객에게 성씨를 물어본다. 대부분은 180여 개나 되는 성씨에 해당된다. 자신의 성씨 종사를 바로 찾기가 쉽지 않다. 계속 따라오며 향을 사라고 한다. 향을 사면 종사로 데리고 간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건축한 항문루(巷門樓)가 보인다. 남쪽 입구다. 벽돌로 쌓고 누각을 얹었다. 아치형 문을 만들고 주기고항이라 새겼다. 작은 크기로 새긴 조종고거(祖宗故居)도 보인다. 100가지 성씨(百姓) 마을이라 가게에도 성씨가 붙었다. 주민들이 황씨소점(黃氏小店)에 옹기종기 모여 심심풀이 노름을 한다. 치매 예방에 좋은 듯 할머니들이 열중하고 있다. 옆에서 흥미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졸다가도 인기척이 들리면 부리나케 무언가를 판다.

골목을 가로막고 정자가 나타난다. 8각 7층의 예쁘장한 석탑이 있다. 귀비탑이 자리 잡고 있다. 남송 황제 도종(度宗)의 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전체 3.36m이고 층마다 높이가 다르다. 4대 천왕과 36명의 나한이 부조돼 있다. 조금 떨어진 호수 근처 광장에 호비상(胡妃像)도 있다. 황궁과 거의 1,000㎞나 떨어진 마을이다. 애처로운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광장 담장에 호비의 슬픈 사연을 그려놓았다. 호비는 황제를 쥐락펴락했던 간신인 재상 가이도의 원한을 샀다. 궁에서 쫓겨나 비구니가 됐다.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죽을 고비를 넘겨 도망치다 강물에 빠졌다. 마침 곡식 운반을 위해 수도로 가던 거상 황저만에게 구조됐다. 호비는 거상의 첩이 돼 주기고항에 은거했다. 과거사를 잊고 행복하게 살았다.

가복이 관청에 밀고했다. 가이도는 마을을 통째로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다. 밀고자를 죽이고 반란의 누명을 씌운다. 역사에서 호비지란(胡妃之亂)이라 부른다. 토벌군이 시시각각 접근했다. 인근 58개 마을이 공포에 떨며 사방으로 피난했다. 호비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졌다. 우물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보은의 탑을 세웠다. 광장에 호비의 마음을 기억하는 듯 천년 용수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을 중심에 주기루(珠璣樓)가 있다. 담백한 담장에 오가고향(吾家故鄉)을 새겼다. ‘우리 고향 집’이라니 소박하고 정겹다. 이층 누각에 태자보살을 봉공하고 있다. 돌림병을 몰아낸다고 믿는 신이다. 실존 인물로 남조 시대 양무제의 장남인 소통이다. 태자 시절 영남에 온 적이 있다. 난슝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병사하는 백성이 급증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니 보살이 있다. 얼굴만 금빛으로 반짝거린다. 공처럼 생긴 막대기를 들고 누더기를 걸친 모습이다. 태자는 백성을 가엽게 여겨 치료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심산유곡을 헤집고 다니다 약재로 알려진 비휴(貔貅)를 어렵사리 사로잡았다. 전설에 등장하는 맹수다. 검으로 뿔을 잘라 가루로 만들었다. 널리 보급하니 돌림병이 서서히 잡혔다. 밤낮없이 일하던 태자가 단오에 병을 얻었다. 성정이 온화하고 인자한 태자를 위해 주민들이 쾌유를 빌었다. 지금도 단오가 되면 모두 나와 폭죽을 터트리며 태자보살에게 병균이 돌지 않도록 기원한다.



지도에 표시된 종사만 40개다. 대부분 제대로 구색을 갖췄다. 간씨대종사 문신처럼 문을 잘 지킬 듯한 그림이다. 황씨대종사 신위처럼 조상에 대한 예의를 잘 갖추고 있다. 나씨대종사 지붕처럼 인물이나 우화, 전설을 새긴 조각상도 많다. 경쟁하듯 꾸민 티가 난다. 조상에 대한 찬양 솜씨가 곧 가문의 역량이다. 황제를 배출한 가문도 있다. 재물신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있다. 사서에 기록된 인물 한두 명 배출하지 않은 가문은 없다. 중국 역사를 아우르는 사당 탐방이다.

옛 모습 그대로 소박한 서씨종사(徐氏宗祠)도 있다. 사당이라 하기에도 어렵다. 문에 별다른 치장도 없다. 문짝도 없고 그저 열려 있다. 조상이 찾아오지 못할까 싶어 또렷이 써 놓았을 뿐이다. 종사라지만 내부는 거주지다. 향을 피우는 신위가 있을 뿐이다. 요씨조거(廖氏祖居)도 비슷하다. 대를 이어 살던 집이다. 어디서나 파는 문신 포스터와 누군가에게 부탁해 얻은 대련이 덕지덕지 붙었다. 대종사가 밀려와도 아랑곳 않고 꾸미지 않고 그저 살아간다. 조상에 대한 마음이야 다 같다고 말하는 듯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