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함의 힘

입력
2024.10.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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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동네 서점에 갔다가 김훈 작가의 산문집 '허송세월'을 들췄다. 서문엔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작가가 50대 중반에 산사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노스님에게 걸려 꾸중을 들은 경험담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 시작한 흡연 인생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은 계기였다. 딴 데서 피우라는 것도 아니고 당장 담배를 끊으라는 직설에 못마땅해진 작가가 그게 쉬운 줄 아느냐고 뻗대자 돌아온 일갈. "이 사람아, 그걸 왜 못 끊어.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작가는 당시의 벼락 맞은 듯한 충격의 요체를 이렇게 설명한다.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곧장 돌입한 금연 시도는 실패했지만 스님 말씀은 화두처럼 남았고, 결국 7년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담배와 결별했다는 얘기다.

저 일화는 14년 전 김우창 교수에게 처음 들은 뒤 마음에 내내 머물러 있는 명제를 떠올리게 했다. "영웅적 사건이 없는 시대가 가장 좋은 것이다." 4·19혁명 50주년이던 그해, 최장집 교수와 대담하면서 김 교수는 "4·19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영웅적 인간인 동시에 비극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저렇게 말했다(브레이트 희곡 속 대사라고 한다). 부연하길 "그렇지 않을 경우 4·19와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이 전부 실현된다는 착각이 강화될 수 있다"며 "극단적 예로 어떤 집단에겐 테러리즘도 영웅적 사건으로만 기억된다"고 했다.

김 작가가 전한 노승의 말, 김 교수가 인용한 희곡 대사에 사람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함'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숨가쁜 고지나 밀실에 처하고서야 공기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되듯이, 고통과 부조리가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단순 자명한 진실을 잊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니 말이다. 끽연가는 담배를 계속 피울 오만가지 이유를 찾아내고 정부는 배수진부터 쳐놓고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지만, 이런 비장함은 그저 나쁜 습관을 바꾸거나 소모적인 경로의존성을 끊고 당연한 길로 들어설 용기가 부족함을 뜻할 때가 많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에게서 모처럼 '당연함의 힘'을 느꼈다. 한은 총재 최초로 지난달 말 기획재정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강남 사는 분들이 아이들 교육한다고 여성 커리어를 희생하거나 아이들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데, '과연 아이들은 행복한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의 '서울대 지역비례 선발제' 제안 보고서, 과도한 강남 교육열을 비판한 자신의 외신 인터뷰를 잇는 발언이었다. 저 인터뷰에서 그는 "치열한 경쟁은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도 했다.

행복. 이 일상적 단어를 우리나라 최고위 당국자가 사회 시스템의 평가 잣대로 언급하니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가 으레 '인생 뭐 있어'라는 추임새를 곁들이며 인생 최고의 가치를 새삼 되새길 때 입에 올리는 단어. 저 당연한 삶의 지복에 좀처럼 가닿기 어려운 이유가 비정한 경쟁 탓이라는 자명한 사실은, '조그만 파우치' 논란만 남은 방송사 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도 저출생 원인을 짚으며 언급한 바 있다. 이 총재가 인터뷰에서 든 비유대로, 우리가 타던 말은 잘 달렸지만 이제 지쳤다. 새로운 말로 갈아탈 때가 됐다는 당연한 판단은, 김 작가가 말한 '쉬움으로 어려움을 격파하는 힘'과 통할 것이다.

이훈성 사회정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