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전 돌입' 이스라엘·헤즈볼라, 배경에는 피로 쓴 '40년 악연' 있었다

입력
2024.10.02 04:30
이스라엘 1982년 '레바논 침공', 헤즈볼라 잉태
헤즈볼라, 게릴라·폭탄 테러로 악명… 정치권 진출
2006년 2차 전쟁 땐 34일 만에 이스라엘 철군
가자 전쟁 계기로 양측 대결 격화… 3차 지상전으로

끝내 현실이 된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친(親)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 사이 지상전은 1980년대부터 이번이 세 번째다. 40년 넘게 피로 써내려 온 질긴 악연이 다시 한번 '세계의 화약고' 중동을 위태롭게 만드는 순간이다.

1982년 이스라엘 침공 후 헤즈볼라 탄생

헤즈볼라 탄생부터 이스라엘 책임이 컸다. 이스라엘은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소탕하겠다며 당시 내전 중이던 레바논을 전격 침공했다. 이른바 '1차 레바논 전쟁'이었다. 그러자 레바논 내 강경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들이 대(對)이스라엘 무장 조직을 결성한 게 헤즈볼라의 모태가 됐다.

이스라엘군은 PLO 소탕에는 성공했지만, 헤즈볼라의 땅굴 게릴라전과 자살폭탄 테러 등에 시달려야 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을 상대로도 테러를 벌였다. 특히 1983년 307명의 사망자를 낸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로 헤즈볼라는 '악명'을 떨치게 됐다.

그 뒤 헤즈볼라는 시아파 맹주 이란의 지원을 받아 덩치를 키워 나갔다. 1992년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수장 아바스 알무사위를 잃었지만, 직후 주아르헨티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테러 같은 피의 보복을 멈추지 않았다. 레바논 총선에 나서는 등 정치권에 진출한 것도 이때다. 이스라엘군이 2000년 레바논에서 철수하자 헤즈볼라의 대중적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2006년 고전 끝 이스라엘 철군

양측은 6년 뒤 전면전을 치렀다. 2006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병사 2명을 납치한 사건이 계기였다. 이스라엘군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또 한 번 '블루라인'(양측 간 경계선)을 넘었다. 다양한 전선이 형성됐던 1차 레바논 전쟁과는 달리, 이때는 '이스라엘 대 헤즈볼라'의 단일 구도로 전투가 치러졌다. '2차 레바논 전쟁'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이후 34일간 벌인 지상전에서 이스라엘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유엔의 중재로 휴전이 이뤄졌다. 이스라엘에서는 160여 명, 레바논에서는 1,000여 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헤즈볼라는 압도적 화력 우위의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몰아낸 '승리'라고 주장했다.


'삐삐폭탄'·나스랄라 암살로 갈등 절정

이후로도 서로를 향해 로켓 공격과 공습을 주고받으면서 준전시 상태였던 양측의 충돌이 격화한 것은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 전쟁부터다. 2018년 레바논 총선에서 승리한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시리아 시아파 민병대 등 '저항의 축' 선봉에 서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지난 1년간 하마스에 궤멸적 타격을 준 이스라엘은 점차 헤즈볼라로 공세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7월 표적 공습으로 헤즈볼라 최고위 지휘관 푸아드 슈크르를 제거하는 등 본격적인 지도부 참수 작전에 돌입했다. 지난달 17, 18일에는 무선호출기(삐삐)·무전기 수천 대 동시 폭발 공격도 감행했다. 이후로도 고강도 공습을 이어가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지난달 27일 헤즈볼라 1인자인 하산 나스랄라를 폭격으로 암살하고 3차 지상전에 나서게 됐다.

위용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