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파격 인사가 아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다양한 국제업무 경험도 가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4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하며 한 말입니다. 그야말로 ‘특급 칭찬’입니다. 윤 대통령은 인사 발표 뒤 차를 타고 사무실을 떠나면서도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미국 변호사이고, 수사·재판 경험이 많은 한 검사장이 가장 적합하다”고 추켜세웠습니다.
‘법무부 장관에게 영어 실력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고차원적 질문도 나왔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49세 한 대표를 법무부 장관 자리에 발탁하며 ‘검찰 기수 파괴’가 단행됐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갔습니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 최측근’임을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 대표를 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되레 강성 친윤석열계는 한 대표를 ‘배신자’라며 손가락질합니다. 국민의힘 지도부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용산에서 한 대표와 만찬을 하며 눈길조차 주지도 않더라”라고 했습니다. 그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여권 인사들은 ①김건희 리스크 ②윤·한 스타일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③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한 대표가 ‘차기 권력’을 겨냥한다면, ‘현재 권력’인 윤 대통령과의 충돌은 필연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권에서는 한 대표가 일찌감치 윤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할 결심’을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지난 1월 김 여사와 한 대표 간의 ‘문자메시지 읽씹’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한 대표는 김 여사의 명품백 의혹에 ‘김 여사의 사과’를 요청하며 윤 대통령과 부딪혔습니다.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김 여사는 1월 15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한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냅니다.
“한 번만 브이랑(VIP·대통령) 통화하시거나 만나시는 건 어떠실지요. 내심 전화를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꼭 좀 양해 부탁드려요.”(1월 15일) “비대위 차원에서 사과를 하는 것이 맞는다고 결정 내려주시면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1월 19일) “함께 지금껏 생사를 가르는 여정을 겪어온 동지였는데 아주 조금 결이 안 맞는다 하여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의심을 드린 것조차 부끄럽습니다.”(1월 25일) 이 문자들은 지난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공개된 것입니다.
한 대표는 김 여사의 절절한 메시지에 일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읽씹’입니다. 당시 4월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 지지율은 추락을 거듭했고, 여권에선 ‘김 여사 사과’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친윤계는 이를 두고 “한 대표가 김 여사의 사과를 뭉겠다”고 퍼부었습니다. 한 대표가 도움을 호소하는 영부인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상당합니다.
한 대표는 왜 그랬을까요. “여사가 사과를 하려 했다면 당대표에게 사적인 문자를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당과 공식적인 루트로 논의해야 한다"는 게 한 대표 측 설명입니다. 집권여당 대표가 선출된 권력이 아닌 영부인과 물밑에서 공무를 논의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윤 대통령과 ‘생사를 가르는 여정을 겪은 동지적 관계’였던 검사 한동훈이, ‘정치인 한동훈’으로 독립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보스 리더십 vs 조선제일검... 너무 다른 스타일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20년 관계'를 어떻게 유지했는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릅니다. 윤 대통령은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두주불사 스타일이며, 검사 시절 '윤석열 사단'을 이끌 정도로 강력한 '보스 리더십'을 자랑합니다. 한 대표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고,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스타일입니다.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이 같은 특징은 그를 ‘조선제일검’에 이르게 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타고난 반골'이라는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정권 당시 “위법을 지시할 때 따르면 안 된다”,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권력을 치받았습니다. 한 대표는 지난해 12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 오르며 “누구를 맹종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윤 대통령 최측근’이라는 꼬리표를 의식한 ‘정치적 변명’ 정도로 해석됐지만, 지금 보면 ‘작심 발언’이 확실합니다.
한 대표는 공사 구분도 유별납니다. 검사 시절 ‘전관예우 변호사’를 일절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그의 일면을 설명합니다. “한 대표는 검사 시절 검사장 출신 선배도 변호사로 개업하면 잘 만나주지 않았다. 설혹 만나더라도 여느 검사처럼 ‘검사장님’이라며 예우하지 않고 꼬박꼬박 ‘변호사’라고 칭했다.”(정치권 관계자)
한 대표의 지상과제는 ‘차기 대통령’입니다. 정치 지형은 한 대표에게 불리합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까지 떨어져 역대 정권 중 가장 낮습니다. 국민이 ‘검사 출신 대통령’을 다시 선택할지에도 물음표가 붙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을 장악한 이재명 대표는 일찌감치 ‘대권 경기장’에 올라 몸을 풀고 있습니다.
한 대표로서는 절박합니다. 대통령과 충돌하더라도 ‘중도·수도권·청년’ 지지층 확장이 불가피합니다. 다음은 여권 관계자의 말입니다. “한 대표는 검찰 시절 권력을 겨냥한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만약 정권이 바뀐다면 보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대표는 지금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다. 국민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입장은 다릅니다. 지지율이 바닥인 윤 대통령은 국정 성과를 내기 위해 집권여당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어떤 정부도 하지 못한 의료·연금·노동 개혁을 성공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검사 후배’인 한 대표를 법무부 장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키운 이유입니다. 윤 대통령에게 한 대표는 ‘또 하나의 태양’이 아닌 ‘국정 조력자’여야 했습니다.
양측 관계는 위태롭습니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의 독대 요청을 일주일 넘게 묵살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자신에 맞서던 안철수·나경원·이준석 의원을 ‘찍어낸’ 경험도 있습니다. 여권에서는 ‘한동훈 패싱’이 ‘한동훈 축출’로 이어질 것이란 루머까지 나돕니다. 한 대표도 윤 대통령과 물러설 기미가 없습니다.
화해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다만 해결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한 대표 측은 “여권이 상식적, 합리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여당 대표로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 친윤계에서는 “윤 대통령은 ‘형님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 한없이 약해지는데, 싸우자고 덤비면 제압해야 하는 성격이다. 한 대표가 조금만 유연해지면 극적으로 관계가 풀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개인 스타일이건, 정치적 욕심 때문이건, 권력 싸움에 피해를 보는 건 국민입니다. 누가 먼저 '국민을 위해' 자존심을 굽힐지 궁금해 집니다. 정치에 필요한 건 '유창한 영어 실력' 같은 특급 칭찬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능력임을 유념하기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