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6,450. 쉬는 날, 우리 동네 골목골목을 누빈 내 걸음 수다. 붉은 벽돌집이 줄지어 늘어선 좁은 골목에선 한동안 서 있었다. 웃음소리 가득하던 어린 시절의 골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 집 마당이 들여다보이던 바자울(싸리 등으로 만든 울타리)도, 고샅길을 지키던 코스모스도 없지만 추억만은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골목 끝 큰길 둘레엔 재개발 공사로 먼지가 풀풀 날렸다. 아파트 세상. 흙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콘크리트를 보며 쓸쓸한 건 나뿐일까. 아파트 건설현장을 지나는데 커다란 땅 구멍 사이에 쌓인 흙더미가 하소연했다. “보드라운 땅이 사라져서 큰일이야. 땅속이 뚫리면 큰일인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숨구멍을 더듬었다.
구멍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를 말한다. 단추를 끼우기 위해 옷에 뚫은 구멍은 단춧구멍이다. 담이나 울타리에 개가 드나들 정도로 파낸 작은 구멍은 개구멍이다. 구멍이 비유적으로 쓰일 땐 좋은 뜻과 나쁜 뜻, 둘 다 안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속 구멍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 즉 희망을 뜻한다. 속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의 구멍과 같은 의미다.
사람도 구멍에 비유할 때가 있다. “우리 부서의 구멍은 마 차장이야”처럼. 이때의 구멍은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마 차장은 구멍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멍은 허점이나 약점을 뜻하기도 한다. 수사에 구멍이 뚫려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앞뒤의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도 구멍이다. 어떤 자리든 논리를 펼 땐 구멍이 없는지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엄마는 가끔 고래구멍을 그리워한다. 고래구멍에 지핀 불로 밥 지어 먹던 시절이 좋았다며 빙그레 웃는다. 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해 나가는 길이 고래다. 고래구멍은 아궁이의 충청도 사투리다. 고래구녁, 솟강알, 아궁지, 구락쟁이, 고쿠락, 부섭, 벅짝도 아궁이의 살아 숨쉬는 지역 말이다.
나는 글구멍이 참 좋다. 글이 들어가는 머리 구멍이 글구멍이다. 글을 이해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귀한 구멍이다. 글구멍이 트이면 글을 보고 이해하는 글눈이 절로 떠진다. 글을 듣고 이해하는 글귀도 좋아진다.
땅이 꺼지는 함몰 구멍(‘싱크홀’의 순화어)은 재앙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자동차, 집은 물론 사람까지도 삼켜버려 ‘공포의 아가리’라고 부른다. 무분별한 개발이 원인이다. 흙의 하소연, 땅의 한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