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 궁리’만 빼면, 완벽한 홍천 생활

입력
2024.09.25 00:01
26면

내가 기존 경력을 살려 일할 수 있는 직장은 홍천에서 40분 거리 춘천에 있는 한 언론사뿐이었다. 면접장에서 나에게 돌아온 첫 질문은 이랬다. ‘서울에서 홍천으로 왜 이주했는가?’ 그리고 이내 나에게 아이가 있음을 인지한 한 여성 임원은 자녀가 손이 많이 갈 나이라며 혀를 찼다.

그 후로 임원이라고 앉아 있는 구성원 5명은 하나같이 내 전 직장들에 대한 호구조사를 이어갔다. 조직 구조부터 운영 방법, 대표의 성향, 어떻게 단시간에 포털 검색 제휴부터 뉴스스탠드에 오르게 됐는지, 콘텐츠 제휴 준비는 어찌하고 있는지까지.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 어디에도 채용을 위한 질문은 없었다.

이날 나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내 경력을 마음 한편에 묻었다. 이곳에서는 내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홍천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분노와 설움이 몰아쳐 한없이 울었다. 내가 마주한 이주의 첫 현실이었다.

성급했고, 무지했다. 새로운 정착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초조함으로 급히 찾기 시작한 일자리. 그런 일자리는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주 3년 차인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새 터전을 살피고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느끼고 소통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먹고살 궁리를 제외하고는 홍천살이가 꽤 만족스러웠다. 사람 하나 없는 강변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윤슬, 전나무가 우거진 고요한 저수지, 제철 채소가 매일 들어오는 로컬푸드 숍, 눈치싸움에 성공하면 여섯 개 레일 전세 수영이 가능한 도민 수영장, 여름과 겨울 기온 차가 커 잘된다는 작약 농장, 삿포로를 연상케 하는 소복한 눈…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대며 다니다 보니 사람도 많이 만났다. 연고 없는 지역으로 이주했다면 외향형 인간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집 밖으로 나서고, 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다.

군청 홈페이지를 시작으로 홍천에서 제공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홍천 청년 커뮤니티, 홍천군 청년창업지원센터, 도시재생지원센터, 농업기술센터, 강원도창조경제혁신센터, 종합사회복지관, 홍천미술관, 홍천문화재단까지 모든 공간의 프로그램을 하나씩 경험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제과 수업에 참석했다. 나는 어머니 네 분과 3조에 속했다. 흙 묻은 옷에 누가 봐도 농부의 모자를 쓰고 수업을 듣는 60대 조원이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부자연스럽게 들고 수업 내내 열심히 영상을 찍는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화를 하다 그가 대기환경공학 박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딸기 스마트팜을 운영하는 귀농인이며 유튜버다.

어떤 날은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한 조원이 머랭이 만들어지는 과학적 원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남에서 잘나가는 과학 강사였다. 홍천 최초의 과학 학원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방과후 수업에도 참여한다고 했다.

가장 연장자인 또 다른 조원이 마을에서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 끝이 찌릿했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실버 이야기 예술인이다. 어르신들이 어린이집 등에 방문해 재미있고 교훈이 되는 옛이야기와 선현 미담을 들려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그는 아이들 이름 하나하나를 읊으며 과학 학원 원장님과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한다.

집 밖을 나서고 나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홍천을 찾아온 사람들을 마주 보며 해답을 찾은 듯했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면적이 가장 넓은 이 땅에 내 일자리 하나 없겠어?’ 그때부터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김도담 지역가치창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