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집집마다 돌며 30~40년 전 결혼 사진을 좀 달라고 하니 ‘정신 나간 여자가 왔다 갔다’고 하더라고요. 가까스로 사진 50~60개를 모아 계남정미소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지난달 21일 찾은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있는 계남정미소에는 '공동체 박물관'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1978년부터 마을 주민이 운영해온 정미소를 김지연(76) 관장이 2005년 500만 원에 매입해 이듬해 문을 연 전시공간이다. 김 관장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을 기록하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공동체 박물관'이라 칭했다"고 설명했다.
과거 풍요의 상징이었던 정미소가 자취를 감추며 사람들의 뇌리 속에 추억으로 남은 것처럼, 정미소는 김 관장에게 각별한 존재다. 회사원과 전업주부로 살다 50세 늦깎이로 사진에 입문한 그는 1999년부터 전국을 돌며 정미소 500여 곳을 카메라에 담아 2002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얼마 안 돼 마련한 공간이어서다. 요즘에는 공장이나 폐교를 카페나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일이 흔하지만, 계남정미소가 문을 열 때만 해도 보기 드문 전시관이었다. “사라지는 공간이 아쉬워 관심 갖기 시작한 게 이제는 나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공간이 됐어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정미소를 어렵게 얻었지만 오래된 건물인 만큼 개보수 작업이 만만치 않았어요.”
지금까지 유일하게 손을 대지 않은 건 60평 남짓한 공간 한쪽에 자리 잡은 정미기다. 그는 “전시관 개관 초기엔 기계를 가동하기도 했다”며 “쌀을 찧어 떡이라도 해서 마을 사람들, 관람객과 나눠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기계가 오래돼 실행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베푸는 게 몸에 밴 김 관장은 정미소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점심 무렵 찾아온 관람객에게는 손수 지은 밥을 내주기도 했다.
김 관장은 18년간 계남정미소에서 주로 진안 지역과 관련한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의 관혼상제와 동네 잔치 모습 등이 담긴 첫 전시 ‘계남마을 사람들’부터 ‘진안골 졸업 사진전’, ‘보따리’, ‘할아버지는 베테랑’ 등 마을 주민의 사진으로만 꾸민 전시가 30여 차례나 됐다. 계남정미소가 입소문이 나자, 전국 각지에서 벤치마킹하러 오기도 했다. “기획, 주제, 작품 선정, 배치 등 모든 것을 제가 고민하고 결정해요. 전시 타이틀만 보고 ‘마음을 울렸다’며 눈물 흘린 관람객도 있었죠.”
여전히 ‘사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빛이 반짝이는 김 관장이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전주 자택에서 차로 매일 1시간 거리인 진안을 오가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쳤다. 홀로 전시공간을 관리하기에도 한계를 느꼈다. 김 관장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여서 직원을 고용하기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결국 2012년부터는 이따금씩 전시회를 열고 있다. 덩그러니 빈 정미소를 채워 2년 만에 다시 문을 열게 된 건 정영신 작가 덕분이었다. ‘진안 그 다정한 풍경’을 주제로 6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80년대에 마이산 자락을 따라 장(場) 보고 집으로 가는 엄마들, 강아지와 함께 마이산 중턱을 달리는 아이들 등 당시의 농촌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서 서학동 사진관도 운영 중인 김 관장은 각종 현안에도 관심이 많아 ‘자영업자’, ‘택배’ 기획전도 열었다. 현재는 대안학교 학생들을 조명한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아이-금산간디학교의 활동 모습’(내년 전시 예정)을 준비 중이다. “사진의 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거죠. 제가 계남정미소를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먼 훗날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존되길 바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