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타클래라의 애플스토어. 아이폰16 시리즈가 미국, 한국 등에 정식 출시(20일)된 이후 첫 주말이라 평소보다 많은 방문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심은 아이폰 신제품에 쏠려 있었으나, 함께 출시된 스마트워치 애플워치와 무선 이어폰 에어팟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이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에어팟 시리즈 중 고급형 제품인 '에어팟 프로2'를 살펴보며 '반응이 어떠냐'고 직원 마크에게 물었다. "원래 에어팟 프로2는 다른 에어팟에 비해 인기 제품은 아닐 텐데도, 이번에는 관심이 많다. 부모님 선물용으로 사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존의 주 소비자층인 젊은 세대뿐 아니라 첨단 기기와는 비교적 덜 친숙한 고령 소비자들의 구미도 당길 만한 제품이라는 뜻이었다.
이유는 이 제품에 새로 추가된 '보청기(hearing aid)' 기능에 있다. 아직은 이 기능을 구동하는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지 않아 체험이 불가능하지만, 에어팟 신제품을 확인하려는 이들 대부분이 궁금해하고 있다고 마크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할머니가 에어팟을 끼고 아이폰을 통해서 손자와 페이스타임(영상통화)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정말 쿨하지 않아요?"
에어팟 프로2는 애플이 2년 만에 선보이는 에어팟 프로 신제품이다. 애플은 이 제품의 첫 공개일인 지난 9일 발표 행사에서 비처방 보청기(OTC 보청기) 기능을 가장 큰 특징으로 내세웠다. "청력 테스트를 통해 얻은 개인화된 청력 프로필을 사용해 이어폰을 임상 등급의 보청기로 전환한다"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그리고 사흘 후인 12일, 애플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보청기 소프트웨어 승인도 획득했다. FDA는 2022년 처방전이 필요 없는 보청기 판매를 승인한 적이 있으나, 소프트웨어 승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아이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기는 했지만, 미국에서는 애플이 9일 보여 준 신기능 가운데 에어팟 프로2의 보청기 기능이 가장 혁신적이었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블룸버그통신은 "새로운 보청기 기능이 애플의 아이폰16 발표 행사를 구해냈다"고 꼬집었다. 아이폰 새 시리즈 성능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비교해 별반 다를 게 없어 신제품 발표 행사 자체가 맥이 빠질 뻔했으나, 보청기 기능의 '깜짝 발표'가 실망감을 상쇄했다는 의미였다. 청각학자인 니콜라스 리드 뉴욕대 교수는 이번 신제품이 "(보청기 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JS)에 말했다. 보청기의 개념과 사용 방식을 영원히 바꿀 것이라는 뜻이다.
애플은 이어폰에 보청기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 음향 엔지니어와 임상의, 청각학자가 포함된 별도 개발팀을 수년간 운영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정도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건 이 기능이 비단 고령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거의 모든 연령대가 혜택을 볼 것이라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청력 손실을 겪는 사람은 약 15억 명이다. 미국 보건 당국은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미국인을 약 3,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실제로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는 인원수다. 애플 사내 연구팀과 미시간대의 공동 연구 결과, 청력 손실 환자 4명 중 3명(75%)이 보청기를 쓰지 않으며 증세를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는 다양하다. 가격 부담,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낙인, 나이가 들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등을 이유로 비교적 증상이 가벼운 이들이 특히 도움받기를 꺼린다고 한다.
애플이 연내로 예정된 소프트웨어 배포를 실시하면, 에어팟 프로2는 평범한 이어폰에서 의료기기로 즉시 전환된다. 보청기 기능은 이용자 주변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증폭하거나 줄여 준다. 상대방 말소리는 선명하게 들리도록 하고, 주변 소음은 제거하는 식이다. 경증에서 중증도(중간 정도)까지 소리를 듣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이용자는 청각 능력의 실질적 향상을 볼 수 있다.
에어팟 프로2는 아울러 청력 손실 테스트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 성인의 80%가 최근 5년간 청력 검사를 받지 않았고, 이 때문에 자신의 청력 악화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애플이 도입한 것은 표준 임상 접근 방식의 청력 테스트 기능이다. 이어폰만 있으면 '나의 청력'에 문제가 없는지를 바로 시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애플은 "약 5분간의 테스트가 완료되면 각 귀의 청력 손실 정도와 권장 사항 등을 (스마트폰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며 "결과는 이용자의 아이폰에 저장되며, 의사 등과 공유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FDA는 에어팟 프로2의 보청기 기능 탑재를 "청력 지원 도구의 가용성과 접근성, 수용성에 대한 큰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그간 소니, 젠하이저, 휼렛패커드(HP) 같은 브랜드들도 OTC 보청기를 출시했지만, 애플 제품의 파급력은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애플 에어팟은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이어폰이 됐을 뿐 아니라 '애플'이라는 기업에 대한 높은 인지도와 신뢰도 때문에 보청기 착용을 꺼리던 이들도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다. 통상 1,000달러(약 134만 원)를 웃도는 다른 OTC 보청기와 달리, 에어팟 프로2는 가격도 249달러(한국 출시가 34만9,000원)로 저렴한 편이다. WSJ는 "무언가를 귀에 꽂고 다니는 게 너무나 일반화했고 심지어 멋있기까지 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보청기를 안 쓰던 이들도 '이 제품은 편안하게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이어 "에어팟 프로2는 보청기가 필요해도 착용하지는 않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가장 저렴한 옵션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플은 20일 에어팟 프로2와 함께 출시한 애플워치 10에는 수면 무호흡증(Sleep Apnea) 알림 기능을 탑재했다. 수면 무호흡증은 수면 중에 호흡이 일시적으로 멈추며 몸이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증상으로,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사람이 영향을 받고 있으며 대부분은 진단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고 한다. 새 애플워치는 손목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 호흡 패턴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고 무호흡을 감지하여, 이를 시각화해 아이폰을 통해 이용자에게 제공한다.
많은 테크업체가 심전도와 혈압, 혈중 산소 포화도, 근 골격량, 수면 질 등을 측정해 건강 관리를 돕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기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수면 무호흡증 알림 기능이 추가된 스마트워치와 보청기 기능이 추가된 이어폰의 출시는 또 하나의 진전으로 평가된다. 테크업계에서는 애플이 헬스케어 기능 강화를 통해 이용자층을 넓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일상과 더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브랜드 충성도도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당연히 수익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스마트기기의 헬스케어 혁신에는 여러 제약 사항도 따른다. 가장 큰 걸림돌은 각국의 규제다. 애플은 에어팟 프로2의 보청기 기능과 애플워치 10의 수면 무호흡증 알림 기능을 미국에서는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한국에는 아예 소개하지 않았다. 애플은 똑같은 제품이 출시된 한국에는 이 기능들을 선보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았으나, 한국은 규제 이슈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기존 의료기기 제조사들의 반발과 견제도 뛰어넘어야 한다. 스마트 기기만으로 헬스케어가 가능해지면 기존 의료기기 업체들이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애플이 9일 에어팟 프로2를 공개한 직후 보청기 제조사 덴마크 오티콘, 스위스 포낙 등의 주가는 일제히 하락했다. 애플은 지난해 혈중 산소 농도 측정 기술을 탑재한 애플워치 9을 출시했으나, 의료기기업체 마시모가 자사 특허를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낸 소송에서 승소하자 미국 내 판매를 일시 중단한 바 있다.
기술 자체의 완성도도 차차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에어팟 프로2의 경우, 경증·중증도 청력 손실 환자에게만 효과적일 뿐, 고도 청력 손실을 가진 이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배터리 수명이 짧은 것도 치명적 단점으로 꼽힌다. 소니의 경쟁 제품이 한 번 충전으로 최대 26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에어팟 프로2는 6시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