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 초입엔 공중보행로인 ‘서울로7017’이 있다. 회현역에서 시작해 서울역을 스쳐 서부역으로 이어지는 1㎞ 보행전용로다. 1970년 설치된 높이 17m 고가도로를 17개 보행로로 개조해서 ‘7017’이다. 노후 인프라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좋은 예다.
45년간 차가 독점하던 곳은 보행자만의 공간으로 변신했고, 전용 산책로가 부족한 도심에서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보석 같은 길이 됐다. 사각형이나 원형 아닌 선형의 공원, 차 걱정 없이 동행과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이 특징은 ‘시장 이명박’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청계천 산책로와 비슷하다.
이 선형 공원(어쩌면 선형 광장)은 연결성도 뛰어나다. 남대문시장 동편에서 서울역을 가려면 예닐곱 번 찻길을 가로질러야 하지만, 여기로 가면 편도 2차로 하나만 건너면 된다. 편의성과 별도로 직접 와야만 볼 수 있는 게 있으니 사람들의 표정이다. 수년간 여길 걸었던 경험상, 지상 17m 위를 걷는 이의 입꼬리는 빌딩 옆 좁은 인도를 지나는 행인과 비교해 대체로 올라가 있다.
왜 그럴까. 공중보행로는 독특한 시선과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도시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시선 높이가 몇십㎝만 달라져도 보이는 세상이 확 다르다. 탁 트인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중길에선 사방의 푸른 하늘, 빌딩 사이로 살짝 얼굴을 드러낸 인왕산의 자태, 야트막한 언덕 위 약현성당의 첨탑, 서울역으로 속속 들어오는 열차의 멋진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소는 어쩌면 철거될지도 모른다. 서울역에 ‘국가상징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 변수다. 광화문과 어떻게 다른지, 왜 서울역 근처가 국가상징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전임 시장 때 조성된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의 철거 얘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흔적 지우기라는 말도 있다.
물론 전임자가 남긴 악영향이 적지 않았단 점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오래 집무실을 지킨 시장의 흔적을 다 치워 ‘박원순 시대’가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순 없다. 뜯어내기보단 개량하고 고치면 되는 것도 많다. 세운상가 보행로 건설에 문제가 많았다면, 앞으로 도시개발의 반면교사로 삼으면 그만이다.
박원순이 만들었든 이명박이 구상했든, 멀쩡히 제 역할을 하는 도시 명소를 인위적으로 없애는 일엔 동의하기 어렵다. 차가 덮칠 걱정 없이 동료와 웃고 떠들면서, 살짝 땀이 오를 정도로 걸을 수 있는 길. 스트레스의 근원(일터 혹은 사람)에서 잠시 벗어나 평소와 다른 높이에서 색다른 것을 보고 남다른 자극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훌륭한 휴식 공간 아닐까. 그래서 이 길의 존재는 유별나고 소중하다.
단체장 교체를 거듭하는 도시의 외관은, 이질적 퇴적물이 층을 이뤄 차곡차곡 쌓여가는 지층 형성과 유사하다. 전임자가 깔아둔 기반 위에 현임자의 업적을 더하고, 현직이 쌓은 지층은 또 후임이 솜씨를 발휘할 캔버스가 된다. 그래서 지금 서울의 모습은 이명박(4년), 오세훈(5년), 박원순(9년), 또 오세훈(2년+)이 덧칠을 거듭한 공동 유화 작품이다. 현직 시장은 지금은 가장 위층에서 그리고 있지만, 그 역시도 다음 올 사람에게 가장 위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 내가 주도적으로 그릴 캔버스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켜켜이 쌓인 도시의 역사 중 특정한 층을 다 도려낼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