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비행기를 타고 휴가지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버스정류장에 갔다. 나름 번화한 곳에 위치한 정류장이었지만 늦은 시간인 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술 취한 아저씨 무리, 젊은 남성 무리가 지나간다. 나는 날씨가 더워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무리 속 한 남성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이 불쾌해 같이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더 노려보고 싶었고, 마음 같아서는 뭘 보냐고 쳐다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순간 무서웠다.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괜히 자극했다가 내가 위험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등산로에서 모르는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해 주먹에 철제 너클을 낀 채 무차별 폭행하다 살인한 사건도 떠올랐다. 결국 불쾌하지만 참는다. 그리고 누구라도 나에게 참으라고 할 것이었다.
이런 일은 낮에도 일어나며, 나만의 경험도 아니다. 여성이라면 아침부터 밤까지 수시로 이런 불쾌한 시선에 노출돼 있다. 보통 누군가를 쳐다보다가도 그 사람이 쳐다보면 눈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상하게 남성들은 여성을 쳐다보는 데 거침이 없다. 전형적인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다. 이렇게 타인의 신체 부위를 성적으로 쳐다보는 행위를 ‘시선 강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적 대상화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저항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여성의 삶이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일상인 사회에서 딥페이크 성폭력은 놀랍지도 않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화가 진행되는데 성폭력만 진화하지 않을 리 없다. 이제 와서 갑자기 생겨난 일인 양 허둥대는 정부의 모습이 황당한 또는 믿음이 안 가는 이유다.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 성폭력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는데?
물론 마땅히 처벌해야 함에도 입법 공백이 있는 부분은 서둘러 입법으로써 정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다. 우리는 이미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고, 이에 대응해 ‘N번방 방지법’이라는 이름을 붙여 인터넷 사업자에게 디지털 성범죄물 삭제 의무를 부과하고, 성 착취 영상물의 제작·유통 행위를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딥페이크 성폭력을 마주하고 있다. 다시 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불법 영상 삭제 지원을 더 해주면 문제가 해결될까? 구조화된 성폭력, 성차별이 개선되지 않는 한 성범죄는 진화해 더 놀라운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단순히 개별 행위에 대응하는 입법 보완이 아닌, 구조적 성폭력을 인지하고 사회적으로 성평등 인식을 제고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특히 이번 사태의 가해자 중 상당수가 10·20대라는 것인바, 제대로 된 성교육과 성폭력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난 6일 대한문 앞에서 여성들은 또다시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고 외쳤다. 평온한 일상이 쟁취의 대상이 된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