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 혹은 관모... 700년 고촌 담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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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0:00
<147> 영남 광동 ⑨ 칭위엔 상악고촌, 사오관 남화선사

1279년 남송 왕조가 멸망한다. 주희의 6대손 주문환은 천자를 호위해 광저우로 왔다. 몽골족 원나라에 맞서 항거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아버지의 주검을 짊어지고 아들이 몰래 도피했다. 주씨 후손이 32대째 살아가는 집성촌으로 간다. 2006년 광둥의 가장 아름다운 향촌 중 하나로 선정된다. 칭위엔 포강현(佛岡縣)에 위치한 상악고촌(上嶽古村)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선비의 자태를 지닌 주희가 반겨준다.

주희 후손이 세운 상악고촌



다섯 가구가 하나의 인(鄰)으로 이웃한다. 다섯 이웃이 하나의 리(里)를 구성한다. 명나라 이후 주민을 관리하던 단위다. 700년 넘게 살아온 고촌에 108채의 고건축이 남았다. 연못 너머에 귀인리(歸仁里)가 보인다. 3개의 대문이 나란하고 하나의 저택처럼 붙었다. 상중하로 나눠 부르는데 모두 귀인리라 적혀 있다. 귀(歸)의 서체를 다르게 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12월 아침 날씨는 영상 10도 정도로 쌀쌀하다. 대문 안쪽에 할머니가 장작을 피우고 몸을 데우고 있다. 눈인사하고 손을 녹이니 따뜻하다. 다 쓰러져 가는 가옥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여러 사람이 거주한다. 옆에서 불을 지펴주던 아주머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좁은 마당에 우물이 있다. 마중물 펌프도 보인다. 주방에는 까맣게 바랜 냄비가 아침밥을 덥히고 있다. 가마솥 걸친 아궁이도 있다. 슬쩍 방을 열어보니 어두컴컴하다.

발길이 종종 많던 관광지다. 건축양식이 오룡과계(五龍過階)라는 표지판이 있다. 본채와 곁채 다섯 채를 길게 연결한 형태다. 다섯 마리 용이 계단을 넘어간다 하니 온전히 살아 있다면 가관일 듯하다. 무너진 담장을 보니 어떤 구조인지 알만하다. 5m에 이르는 담장이며 사이 간격도 좁다. 지붕에는 이차함수 포물선처럼 생긴 담장이 여전히 남아있다. 영남지방에 자주 등장하는 확이루(鑊耳樓)다.

확(鑊)은 가마솥이다. 솥의 손잡이(耳)처럼 생겼다. 모양새로 유명세를 얻는데 관모(官帽)가 소환됐다. 샛길을 찾아 앞동산으로 올라가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한두 채가 아니라 50여 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솥이라는 일상성보다는 관리의 모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 독점오두(獨佔鰲頭)라는 사자성어가 붙어 다닌다. 장원급제를 말한다. 원나라 시대에 공연 대본인 잡극이 생겨난다. 포청천이 등장하는 진주조미(陳州糶米)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궁전 계단에 부조된 거북 머리인 오두에서 장원급제 명단을 영접한다.

두 개의 포물선이 나란하다. 안성맞춤인 전망대를 잘 찾았다. 옆면이 드러나 관모가 겹겹이 놓였다. 기와지붕을 양쪽에서 보호하고 있다. 바람을 막고 화재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회벽 담장 위로 검은 테를 두른 듯하다. 다닥다닥 붙은 모양이 좀 답답하기도 하다. 청나라 초기에 건축됐다. 2013년 4월 초속 30m가 넘는 강풍이 불었다. 수백 년 넘는 나무가 뿌리 뽑힐 정도였다. 지붕이 훼손되고 담장이 기울어졌다.


산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간다. 상당 부분 수선했지만 주민이 살기는 어려웠다. 대부분 폐허처럼 남았다. 벽돌과 기와, 담장과 지붕, 관모 또는 포물선도 여전하다. 광둥성의 백천만공정(百千萬工程) 혜택을 받았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주변과 어울리게 원형을 보존하는 프로젝트다. 백현천진만촌(百縣千鎮萬村)을 줄여서 부른다. 112개 현, 1,609개 진, 2만6,500개 촌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나라 면적의 5분의 4인 광둥에 촌이 참 많다. 담장에 그린 확이루가 참 예쁘다. 장관을 보여준 건축물이다. 강풍과 지진이 와도 버티고 버티면 좋겠다.

육조 혜능의 보림, 남화선사

동북쪽으로 140km 떨어진 사오관(韶關)으로 간다. 광둥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급시다. 시 남쪽 취장구(曲江區)에 육조 혜능(중국 선종의 제6조)이 설법한 사찰인 남화선사(南華禪寺)가 있다. 몸은 보림에 있으나 마음은 집에 있다(身在寶林心在家)고 했다. 몸이 있던 보림이 남화선사다. 남북조 시대인 502년 인도 고승 지약선사가 왔다. 광저우에 도착 후 70년 전 구나발타라(功德賢)가 세운 제단(지금의 광효사)에 보리수 한 그루를 심었다. 170년 후 득도한 보살이 나타나 불법을 설파하리라 예언했다. 북상해 조계(曹溪)에 이르렀다.

산문에 '조계'라 새겼다. 강희제 시대인 1715년에 세웠다. 명나라 이부상서를 역임한 오엄의 해서체를 가져와 썼다. 세로로 쓴 칙사남화선사(敕賜南華禪寺)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하사했다. 몸이 있다던 보림사(寶林寺)다. 삼보는 불법승(佛法僧)이다. 지약선사는 삼보를 갖춘 사찰을 세우고 싶었다. 극락세계의 상징인 인도 보림산과 닮았다며 관리에게 요청했다. 양무제가 보림사 편액을 하사했다. 마침내 170여 년이 흐른 676년 보리수의 예언이 구현됐다. 혜능이 체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정식 승려가 됐다. 이듬해 보림사로 와서 37년 동안 설법했다. 신화 같은 예언이라 믿기지 않는다. 신도들은 모두 믿었고 지금껏 회자된다.

두 번째 산문이 보림문이다. 붉은 바탕에 금빛으로 보림도장(寶林道場)이 걸렸다. 중화민국 정부의 주석이던 린썬이 쓰고 주지인 허운 대사가 세웠다. 글씨 왼쪽과 오른쪽에 제작 연도를 적었다. 중화민국 27년과 불기 2965년이라 썼다. 1938년이다. 주석과 주지가 모두 자기 소신을 남긴 셈이다. 문 양쪽에 동월제일보찰(東粵第一寶剎)과 남종불이법문(南宗不二法門)이 보인다. 월(粵)은 명나라 시대부터 광둥과 광시를 아우르는 칭호다. 동월인 광둥의 제일 사찰이라는 뜻이다. 육조가 세운 선종인 남종이 둘도 없는 법문이다. 불학을 수행하는데 최고라는 극찬이다.

천왕보전 앞에 금빛 찬란한 의발(衣鉢)이 나타난다. 건립 1,500년을 기념해 2002년에 제작했다. 오조가 육조에게 전수한 가사와 바리때를 구현했다. 바리때 양쪽으로 가사가 치렁치렁 흘러내린다. 약간 떨어져서 안으로 동전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길상이자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영남 지방 방언인 분만발만(盆滿鉢滿)이 자극했다. 접시와 사발을 가득 채운다는 말로 무지하게 큰돈을 벌고 싶다는 바람으로 번졌다. 사찰이 먼저 수익을 챙긴다.


대웅보전은 원나라 시대에 처음 세웠다. 청나라 강희제와 동치제 시대에 중건했다. 단층이었는데 민국 시대에 2층으로 증축했다. 시멘트를 사용해 대들보를 만들었다. 2007년 시멘트를 걷어내고 다시 목재와 철제를 사용했다. 가로와 세로 7칸 규모이고 높이는 19.1m다. 석가모니와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좌정해 있다. 삼세불 양쪽에 18나한이 호위하고 있다. 사면 모두를 500나한이 꽉꽉 채워 조각돼 있다.

삼세불을 등진 벽면에 관음보살이 손짓하고 있다. 두 명의 시동인 선재동자와 용녀도 금빛으로 무장했다. 서유기 등장인물에 홍해아(紅孩兒)가 있다. 화염산에서 300년을 수행하고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려 한다. 관음보살이 체포한 후 홍해아를 선재동자로 삼았다는데 완전 허구다. 경전에 나오는 선재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다. 정도를 이끌어주는 지도자 53명의 선지식(善智識)에게 배운 후 성불한다. 용녀는 불법을 수호하는 24명의 천신 중 용왕인 사가라(娑竭罗)의 딸이다. 아주 총명해 8세 때 용궁에서 문수보살이 설법한 경전을 단번에 이해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수련하고 성불한다.

대웅보전을 나오니 잔뜩 녹슨 솥이 있다. 원나라 시대인 1338년 철로 주조한 천승과(千僧鍋)다. 한 번에 수백 근의 쌀로 밥을 지어 천 명의 승려와 신도가 먹었다. 높이가 170cm이고 지름이 209cm다. 몸체는 활처럼 약간 휘었고 바닥은 원형이다. 솥 윗면은 잡기 좋게 약간 바깥으로 퍼졌다. 윗면에 비문이 있었는데 부식돼 필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지금은 전기로 밥이나 죽을 끓인다. 주방에 있던 솥이 옮겨와 문물이 됐다. 엄청난 열기를 견디며 사명을 다했으니 참배객의 조문을 받을만하다.

8각 5층 전탑이 나타난다. 당나라 시대인 713년부터 지금껏 같은 자리다. 영조탑(靈照塔)이다. 화재로 목탑이 사라지자 명나라 시대에 벽돌로 쌓았다. 민국 시대에 사찰을 손볼 때 중건했다. 1층에 편액이 보인다. 1933년 국민당 군단장을 역임한 리한훈이 썼다. 군인이 쓴 전서체로는 드물게 명필이다. 1995년 석회를 다시 바르고 단장했다. 기단이 10m이고 전체 높이는 30m에 이른다. 석가모니의 불법 그 자체인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있다. 문이 닫혀 볼 수도 위로 올라갈 수도 없다.

탑 뒤에 무덤이 있다. 진아선(陳亞仙) 조묘(祖墓)다. 지주의 조상 무덤이 있으니 에피소드가 있을 법하다. 육조가 조계로 온 후 1,000명이 넘는 신도가 따라왔다. 수백 명의 학자도 방문했다. 불당에서 설법하기가 어려워졌다. 진아선을 찾았다. 육조가 방석 하나만큼의 땅이 필요하다 요청했다. 지주는 육조가 꺼낸 자그마한 방석을 보고는 당연히 내주겠다 동의했다. 방석을 확 펼치니 조계 사방을 다 덮고도 남았다. 사대천왕이 현신으로 출현하기도 했다. 지주는 내뱉은 말을 뒤집을 수 없었다. 다만 사찰을 지을 때 조상 무덤은 남겨달라 간청했다. 무덤을 남기고 땅을 헌납한 공덕도 새겨 놓았다.

신라 승려로 계승된 조계종의 뿌리

육조의 진신상은 진귀한 보물이다. 영조탑에 안치돼 있었는데 조전(祖殿)을 짓고 옮겼다. 유리로 막은 불감 속이라 자세히 살피기 어렵다. 대략 80cm인 좌상이다. 원적이 임박하면 가사를 벗고 다리를 구부려 가부좌한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영양소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 원적 후에 뚜껑이 달린 커다란 독 속에 나무판자를 설치하고 몸을 올린다. 석탄과 목탄으로 열기를 가하면 내장과 분비물이 빠져나와 판자 구멍으로 흘러내린다. 가열을 지속하면 수분도 다 사라지고 육신만 남는다. 육신을 기반으로 옻칠과 모시를 겹쳐 끼우는 협저(夾紵) 공예로 제작한다. 진신상 만드는 과정을 생각하니 숙연하다. 슬픔과 존경이 따랐을 터이니 한 편의 장엄한 장례가 아닐 수 없다.

조전 뒤에 패방이 있다. 앞에는 천하보림(天下寶林), 뒤에는 조계성지(曹溪聖地)라 썼다. 남화선사를 자랑하듯 당당하게 서 있다. 신라 승려 도의(道義)가 혜능의 4대 제자인 지장을 스승으로 삼았다. 37년 동안 수련한 후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우리나라 최대 불교 종단인 조계종의 공식 종조(宗祖)다. 수풀 우거지고 샘물 졸졸 흐르는 천하의 성지에 앉아 남화선사 비문에서 본 육조의 게송을 음미한다.


깨달음은 본성이어서(菩提自性)
본래 청정한 불성이니(本來清淨)
오직 이 마음으로 수행하면(但用此心)
직접 알게 되고 성불하리라(直了成佛)
육조의 게송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