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배제... 아파트 공화국의 민낯

입력
2024.09.18 18:00
26면
대단지 아파트 개발로 중산층 형성
재건축 사업, 거주우열화 두드러져   
기피시설 제공 의무화 서울시 주목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국은 명실상부한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 거주자가 단독주택 거주자의 2배를 넘는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아파트는 선호대상이 아니었다. 농경문화의 전통 관념이 남아 있던 당시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땅을 소유하지 못하는 주거형태로 여겨졌고, 이웃에 생활수준이 속속들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려는 공격적 주택정책이 결합된 결과, 아파트는 반세기 만에 도시중산층을 대표하는 주거형태가 됐다. 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위주의 정부는 봉급생활자들을 경제발전에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했고 이들에게 주택소유와 자산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면서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한국의 아파트 발전사는 중산층 형성의 역사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특히 1970~80년대 경제개발시대에 조성된 서울 잠실, 고덕, 둔촌, 개포지구 등의 수천 세대 규모 대단지 아파트는 중산층들의 베드타운이었다. 대졸 이상 학력, 관리직, 회사원, 교사, 일부 전문직, 4인 가족 등 비슷비슷한 생활 수준의 주민들이 한 동네 한 단지에 모여 살았다. 정부가 기획한 중산층 주거단지에 모여 살면서 주민들이 집단적 정체성, 동질감을 형성한 게 이곳의 특징이다.

20여 년 전 “이 건물들의 관리와 보수, 재건축들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한국 도시관리의 성공여부는 아파트 단지의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에 달렸다”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예언대로 70, 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의 재건축 시기가 도래하면서 문제적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사업성∙개방성∙공공성이라는 세 가지 가치가 정립(鼎立)된 이상적 재건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상위 중산층이 된 아파트 소유주들의 ‘빗장 걸기’가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 계층, 월세 임차인, 노약자나 장애인 접근 배제, 용적률 상향이나 종 변경 대가로 제공하기로 한 공공시설(데이케어센터, 공공도서관, 공공통행로 등)의 제공 거부나 제한적 제공이 그런 행태다.

재건축 과정에서 세대 규모, 즉 자본의 소유관계에 따라 철저히 거주공간의 질을 서열화하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올림픽파크포레온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11월 1만여 세대의 입주가 시작되는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단지가 그 사례다. 건축심의 전 서울시의 공공건축가들은 '소형 세대의 거주성 확보'를 중시한 재건축단지 설계안을 제시했지만, 심의가 통과되자 재건축조합은 설계를 뒤바꿔 버렸다. 일반에게 분양될 소형 평형은 통풍과 채광이 안 좋고 건축비가 적게 드는 복도식으로 바꿔버리거나 인기 없는 코너 세대에 배치했고, 조합원들의 몫인 중∙대형 평형은 채광과 통풍이 잘되는 판상형, 남향으로 설계했다.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의 저자 이인규는 “함께할 생각 없이 만든 동네에서 과연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입주 후 불거질 주민 갈등을 예견하기도 했다.

주거지의 위치와 행색이 거주자의 지위와 자본을 표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계층 통합을 위한 소셜믹스(social mix)의 필요성이나 대주택단지의 공공성을 역설하는 일은 비현실적이라거나, 기만적이라는 조롱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신속한 재건축을 통한 주택공급을 강조하는 동시에, 재건축 시 시민 기피시설을 반드시 단지 내에 넣도록 하고, 단지 내 시설 개방을 전제로 용적률 상한 등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지키지 않는 재건축 단지를 강력히 제재하기로 한 서울시의 조치들은 격려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이왕구 전국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