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어쩌다 국가에 수십억을 배상하게 됐나?

입력
2024.09.17 10:00
[국가소송 계기로 본 이근안의 일생]
1970년 경찰 입직해 공안통으로 활약
88년 도주해 11년 만에 "지쳤다" 자수
"사죄" 밝힌 뒤 자서전 펴내 2차 가해

1999년 10월 28일 오후 8시 40분. 수원지검 성남지청엔 옅은 안개가 내려 앉아 있었다. 쑥색 점퍼에 감색 바지를 입은 60대 남성이 검찰청 당직실 문을 불쑥 열었다

"자수하러 왔어요." 그가 당직계장에게 내민 주민등록증엔 수배 전단지 속 사진과 같은 증명사진이 보였고, 당직계장은 곧장 수화기를 들어 당직검사에게 '희대의 자수범'을 알렸다.

"검사님, 그 사람이 11년 만에 자수를 하러 나타났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던 전직 경찰관 이근안이 기나긴 도피 끝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근안은 누구인가

이근안은 범죄자 잡는 게 특기였던 경찰이었다. 1970년 순경으로 입직한 후 1972년부터 대공업무를 맡았는데, 매번 특진하며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을 달았다. 표창은 모두 16차례나 받았고, 이중 4개가 '간첩검거 유공' 관련이었다. 1986년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까지 받았고, "이근안이 없으면 공안 수사가 안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실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사를 잘하는 게 아니라 고문 덕분이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고문 수사관들에 대한 수사에 나서자, 이근안이 그간 '관절 뽑기' '전기 고문' '물 고문' 등을 일삼으며 수많은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에 대한 사건을 조작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체구 때문에 '반달곰'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경기경찰청 소속이면서도 '고문 출장'을 다니며 '명성'을 쌓아 1980년대엔 '박중령'으로 불렸다고 한다.

'능력 있는 공안통'이란 가면이 벗겨진 이근안은 줄행랑을 쳤다. 1985년 9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에게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법원이 김 전 의장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이자, 9일 뒤인 1988년 12월 24일 잠적했다. 이날 그에게 도피를 지시하고 돈을 대준 이가 고 박종철 열사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이었단 사실은 훗날 드러났다.

수사 장기화... 검경 검거의지 비판

'도망자' 이근안은 대담하고 뻔뻔했다. 잠적 며칠 뒤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난 김근태를 조사한 일조차 없고, 지금 출두해 여론 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사표는 우편으로 보내고 1989년 3월 경기경찰청에서 해임 처리되자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받겠다고 청구했다. 아내가 수령하려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해 실패했다.

수사기관은 무력했다. 애초 경찰은 이근안을 단순 '직장무단이탈 경찰관'로 보고 내부 수배를 지시했다. 연인원 389만 명을 동원했지만 이근안 가족 거주지 파출소엔 매일 '특이사항 없음' 보고만 쌓였고, 검찰 역시 부장검사가 주임검사를 맡아도 성과가 없었다. 소재를 모르니, 고문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손해배상금에 대한 구상권 소송 대상에서도 이근안은 제외됐다. "못 잡는 거냐, 안 잡는 거냐"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11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탓에 '해외도피설' '사망설'이 나돌았던 그가 제 발로 자수한 이유도 기막혔다. "최근 재판을 받은 동료들의 형량이 비교적 가벼운 것을 보고 마음이 안정되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고도 했으나, 사실 그는 자기 집에 은신처를 만들어 생활한 것으로 조사됐다.

징역 7년 만기출소

이제는 죗값을 물어야 할 차례. 그런데 공소시효가 문제였다. 불법체포∙감금은 형법상 7년 이하 징역에 처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징역 10년 미만 범죄의 공소시효는 5년에 불과했다. 재정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공소시효가 연장된 극히 일부 사건을 제외하고는, 11년 도피 중 상당 부분의 범죄가 형사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근안도 도피 중 아내를 통해 공소시효를 확인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1999년 검찰이 유일하게 기소에 성공한 납북어부 김성학씨 고문 사건 첫 공판에서 이미 시효가 만료된 김 전 의장 사건만 시인했다. 그는 "전선을 사람 발가락에 한 줄씩 묶고 회전축을 돌리면 전기가 통했다"며 고문 기술을 익힌 경위와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김씨에 대한 혐의는 부인했다.

법원은 징역 7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약 70일간 대공분실에 김씨를 감금 후 △양발 엄지발가락에 굵은 쇠봉을 끼워놓고 붕대를 감은 다음 전류를 흘려 보내는 방법으로 전기고문을 하고 △얼굴에 수건을 덮어놓고 주전자로 물을 붓는 물고문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범행이 수사과정에서 행해진 것이라고는 해도 민주적 법치주의를 뒤흔드는 반국가적 행위"라고 질타했다.

이 판결은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복역 중이던 2005년 2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김근태 전 의장이 자신을 면회 오자 사죄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가석방 부적격 결정을 받고, 2006년 11월 7일 만기 출소했다. 그는 점퍼 차림으로 경기 여주교도소를 나서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목사→면직→자서전... 고문 정당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나 싶었던 그는 2008년 목사가 됐고, 4년 후인 2012년 1월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면직되며 다시 입방아에 올랐다. 당시 장로회 측은 이근안이 여전히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며 고문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 목사로서의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다고 판단하고 최고 중징계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듬해엔 급기야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을 내기까지 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었다"며 "간첩이라도 절대 쥐어박아선 안 되는데 쥐어박았다면 그게 잘못이라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책 서문에선 "5공 정권이 사라지자 고문기술자란 대명사로 매도됐다" "정치 색깔에 따라 애국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시대 탓을 했다.

피해자·국가 소송 쇄도... 무대응 일관

고문 피해자들은 그러나 이근안을 가만 두지 않았다. 이근안의 가혹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거짓 자백을 하고 실형을 산 납북어부 고 박남선씨 유족은 2020년 "위법한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강요한 행위와, 자서전에서 박씨가 실제 간첩행위를 한 것처럼 기재해 2차 가해를 한 데 대한 정신적 고통(위자료)을 배상하라"고 소장을 냈다. 또다른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족도 같은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도 합세했다. 이근안의 소재를 알게 된 정부는 지난해 "국가가 2019년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피해자들에게 지급하게 된 손해배상금 중 33억6,000만 원은 가해자인 이근안이 부담해야 한다"며 구상금 청구 소송을 걸었다. 비록 이근안에 대한 형사적 처벌은 공소시효 문제로 한계에 부딪혔지만, 민사적 책임이라도 지워 최대한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차원이었다.

결과는 모두 이근안의 패소였다. 그러나 사실 법원은 그의 잘잘못을 제대로 다투는 데 또다시 실패했다. 이근안이 소송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탓에, 원고 측의 주장을 자백한 것으로 간주된 채 재판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박씨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자체적으로 사건에 대한 이근안의 책임을 30%로 제한하고, 공동 피고인 국가와 함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

최다원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