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폭염에도 농사지어 싹 다 기부합니다"

입력
2024.09.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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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식 포스코 에코팜 봉사단 단장
퇴직자 교육으로 시작, 농사 기부로
토요일마다 무상 임대 밭서 구슬땀
167명 활동...12년째 틈틈이 농사  
채솟값 폭등에도 아낌없이 내놔 
특허 비료 만들어 울릉도까지 기부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용광로에 철광석을 녹여 쇳물(용선)을 뽑아내는 제선설비부 파트장 김상식(54)씨. 고품질의 용선을 얻기 위해 평소 용광로 성능 개선에 온 힘을 쏟는 김씨는 휴일에도 쉬지 않고 회사 동료들을 만나러 나간다. 김씨의 발길이 가는 곳은 제철소가 아닌 밭이다. 매주 토요일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밭 3곳에서 잡초를 뽑고 물과 비료를 뿌리며 여러 작물을 키운다. 무료급식소 등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이 그가 심은 쪽파와 양파, 배추 등 채소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는 역대급 폭염 탓에 채소 가격이 급등해 식재료 확보에 부담이 클 것”이라며 “너무 더워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수확을 기다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한시도 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농사를 지어 형편이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포스코 에코팜 봉사단 단장이다. 에코팜이 처음부터 봉사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지난 2010년 퇴직을 앞둔 임직원들의 귀농을 돕기 위한 포스코의 영농교육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폐교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죽장초등학교의 죽북분교를 교육장으로 리모델링한 뒤 텃밭 가꾸기, 작물재배 실습 교육 등이 이뤄졌다.

에코팜이 봉사단으로 변신한 건 지난 2012년이다. 교육생 50여 명이 수확한 작물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에코팜 봉사단의 기부활동이 알려지면서 “무료로 땅을 빌려주겠다”는 땅주인들도 나타났다. 처음 900㎡에 불과했던 무상임대 밭은 차츰 늘어 최근 5,289㎡까지 커졌다. 50명으로 시작한 봉사단 규모도 167명이나 된다.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종자 구입비와 농기계 임대료 등은 연간 약 1,200만 원으로, 모두 포스코 지원을 받아 충당한다.

물론 농사 실패도 부지기수였다. 지난해 여름에는 석 달 넘게 애써 키운 옥수수가 수확을 일주일 앞두고 멧돼지떼 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됐다. 올여름에는 장대비를 맞아가며 꼬박 넉 달간 애지중지 키운 감자가 봄철 계속된 비로 전부 썩었다. 김씨는 “자식처럼 소중히 키운 작물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을 때 그 심정은 말로 다 못 한다”며 “몇몇 직원은 너무 속상해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김씨와 동료들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생산성 향상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전문 농업인도 생각해 내지 못한 기술을 갖게 됐다. 제철공정에서 나오는 철강 부산물 슬래그로 작물 재배에 효과가 있는 규산질 비료를 얻었고, 바다를 황폐화시키는 불가사리에 미생물을 섞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는 액상비료를 만들었다. 김씨는 “포항은 물론 멀리 울릉도 농민들에게도 자체 개발한 비료를 무료로 나눠줬다”고 말했다.

올해는 폭염으로 물가가 올라 식재료 확보에 비상이 걸린 포항지역 무료급식소들이 큰 부담을 덜었다. 하루 150~200명이 찾는 포항시 남구 송도동 송림노인복지회관과 포항 남구 해도동 포스코나눔의집은 지난 7월 에코팜 봉사단이 수확한 대파 500단을 저온 창고에 저장한 덕에 추석까지 이어진 폭염에도 예년과 동일하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김씨는 "봉사단원들 모두 일과 농사를 병행하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고 서투른 점도 많지만 땀 흘린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포항= 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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