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상무 출신 최모(66)씨가 경제적 가치만 수조 원에 달하는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에 빼돌린 혐의로 최근 검찰에 구속 송치된 사건과 관련, 헤드헌팅 업체들이 기술유출의 통로로 악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반도체 '빅2'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반도체(현 SK하이닉스)에서 임원을 지낸 최씨가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반도체 전문가들과 접촉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최씨는 이전에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도를 유출해 중국 시안에 '복제 공장'을 세우려 한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때도 비슷한 수법을 썼다. 반도체학과 교수 출신 대표가 운영하는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여럿 영입한 것이다. 중국 기업들이 헤드헌팅 업체를 매개로 한국 인재를 데려가 기업 기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는데 금지할 방법은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해외 기업, 특히 중국 기업들은 수년째 헤드헌팅 업체들을 통해 첨단 분야 인재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 11일 국내 주요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중국 이직'을 검색하니 중국 기업에 출근할 '반도체 전문가'를 구하는 글이 손쉽게 발견됐다. 모집 공고는 △석사 이상 △경력 4년 이상 △반도체 소자, 설계, 공정 개발 경력 △반도체 소자 및 반도체 칩 연구 개발 경력 등 노골적으로 '경험'을 요구했다. 일부 공고에서는 최고경영자(CEO), 부장급 이상 경력자를 구했다. 이 업체는 하이닉스 출신 헤드헌터가 서치폼(중국 헤드헌팅 회사)과 제휴해 반도체 분야 인력을 모집하고 있었다. '기술만 빼앗기고 계약 만료 전 토사구팽 당한다'는 이야기가 돌며 중국 헤드헌팅 붐이 다소 사그러지긴 했지만 연봉 수배 인상이나 체류비와 자녀 국제학교 교육비 지원 등 좋은 처우는 여전한 유인이다.
구인구직에 이어 직접 제안도 더해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헤드헌터가) 주요 공장 앞에서 대기하다가 퇴근하는 직원에게 말을 거는 '핀셋 헌팅'도 이뤄진다"고 귀띔했다.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고문급 인사가 헤드헌터를 자처해 개인적으로 아는 인력을 빼오며 (중국 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방식도 동원된다"고 설명했다.
기술유출로 인한 경제 안보 우려가 커지는데 헤드헌터들을 막을 뚜렷한 법적 근거는 없다. 산업기술안보분야 경찰 관계자는 "현행 산업기술보호법엔 알선, 중개나 소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어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번에 최씨가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의 20나노급 디램 기술처럼 산업기술보호법으로 보호되는 국가핵심기술이 유출됐을 경우 헤드헌팅 업체의 위법성을 따져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법적 제재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일부 헤드헌터들 사이에선 '일단 (중국으로) 넘기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중국 반도체 분야 헤드헌팅을 제공하는 한 업체 대표는 "4억 원대 연봉을 준다고 해서 갔는데 6개월 만에 기술 뺏기고 돌아오는 경우가 다수"라고 했다. 중국 기업의 인재 영입 목적이 사실상 기술유출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대표는 "입사 후 3개월 지나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어 중국에서 (인력 구해달라는) 연락이 오면 그냥 한다"고 털어놨다.
헤드헌터가 기술유출 가능성을 인지했다면 방조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반도체뿐 아니라, 바이오, 디스플레이, 전기차, 2차 전지 등 다양한 분야의 주요 기술이 인력과 함께 중국에 새 나가고 있다"며 "정부나 국회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