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쌀로 지은 고봉밥에 고기반찬.
한국인이라면 그 옛날 '부잣집 잔칫날 밥상'에 왠지 모를 선망이 있다. 쌀밥과 고기의 조합이 명절처럼 가족이 한데 모이는 특별한 날에 잘 빠지지 않는 이유다. '저속노화' 신드롬을 일으킨 정희원(40)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그런 식사를 한다면 노화를 부추기는 '가속노화'의 액셀을 밟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 교수가 책 '저속노화 식사법'에서 이야기하는 천천히 나이 드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혈당을 급격히 높이는 정제된 곡물보다 통곡물을, 동물성 단백질보다 콩, 두부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즐겨 먹었던 과거의 '가난한 집 밥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단순당과 첨가물 범벅인 초가공식품의 자극적인 맛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풍요를 넘은 과잉의 시대, 정 교수의 호소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올해 7월 나온 '저속노화 식사법'은 2만5,000부가 팔렸다. 추석을 앞두고 넘쳐나는 명절 음식을 마주할 당신을 위해 정 교수에게 서면으로 조언을 구했다.
-저속노화 식사법이란 무엇인가요.
"동물성 음식과 포화지방이 높은 음식을 제한하고, 자연식물식에 중점을 두는 식사법입니다. 한국형 MIND(Mediterranean-DASH Intervention for Neurodegenerative Delay) 식사법인데요, MIND 식사법은 생선을 자주 섭취하고 올리브유를 주된 요리용 기름으로 사용하는 '지중해식'과 고혈압 예방을 위해 칼륨이 풍부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고 나트륨 섭취를 제한하는 '대시(DASH)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MIND 식사법을 한국 현실에 맞게 변형한 것이 저속노화 식사법입니다."
-키토식, 지중해식, 카니보어식 등 유행하는 식사법과 차이는요.
"우선 과일과 채소를 두루 먹으라고 하지 않고 인지기능 강화에 좋은 '베리류'와 '푸른 잎채소'의 섭취를 중요시하는 게 다릅니다. 둘째는 '빼기'에 집중한다는 겁니다. 인지기능을 떨어뜨리는 포화지방과 트랜스지방, 즉 붉은 고기, 가공육, 버터, 마가린, 치즈, 과자, 후식류, 튀김류, 패스트푸드 등의 음식 섭취를 제한하지요."
-식사를 통해 뇌를 '관리'할 수 있다는 건가요.
"식후 식곤증을 겪어 보셨을 텐데요.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을 '브레인 포그'라고 합니다. 급격한 혈당 변동으로 발생하죠. 흰쌀밥, 면, 빵 등 탄수화물로 가득한 식사를 한 이후에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브레인 포그는 저속노화 식사 지침을 따르면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저도 저속노화 식사를 하면 작업 기억, 집중력 등 인지 기능이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속노화 식사법의 효과는 연구로 입증됐다. 미국 영양역학학자 마사 클레어 모리스 등이 960명(평균 81.4세)의 인지기능을 평균 4.7년 추적 관찰한 결과, MIND 식사 지침을 잘 지킨 그룹의 뇌는 2.5년 나이 들었고 지키지 않은 그룹의 뇌는 10년 늙었다.
-가속노화를 가장 부추기는 생활습관은 뭔가요.
"수면을 경시하는 것이죠. 수면 부족은 인지기능에 치명적입니다. 하룻밤을 새우면 운전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혈중 알코올 농도 0.08% 상태와 비슷한 집중력 장애를 일으킵니다. 만성 수면 부족은 치매 발병을 10년쯤 앞당길 수 있고요. 대뇌, 특히 전두엽 기능이 떨어져 자제력이 저하돼 단순당, 정제곡물, 술, 커피, 담배 같은 해로운 자극의 유혹에 더 취약해지게 됩니다."
-명절 기간까지 식단 관리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요.
"저희 가족은 명절에 나물, 생선, (양상추, 파프리카, 방울토마토를 넣은) 샐러드, 전, 경상도식 탕국을 먹습니다. 밥은 제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흰쌀밥을 먹고요. 추석에도 식사법을 신경 써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하실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흰쌀밥과 송편을 좀 적게 드시는 게 좋습니다. 나물을 좀 많이 드시고요. 한 끼 정도는 콩, 잡곡을 넣은 밥에 나물을 넣고 비벼 드시면 어떨까요?"
-저속노화 식사법을 접목하기 쉬운 추석음식이 있을까요.
"렌틸콩을 넣은 송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온라인에 콩 송편을 악마화하는 '밈'이 있더군요. 콩 특유의 식감, 비린내, 맛 때문일 것 같은데, 렌틸콩은 콩보다는 팥에 가까운 냄새와 맛이 납니다. 콩 송편이 정말 싫으시면 팥 송편은 어떠세요?"
-영양제를 명절 선물로 많이 주고받는데, 도움이 될까요.
"국립암센터 명승권 교수님께서 최근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채소, 과일 등의 식품으로 비타민C를 많이 섭취하면 폐암 발생 위험률을 떨어뜨리는 영향(18% 감소)이 있었지만, 보충제 섭취로는 유의미한 효과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영양제를 살 때 눈, 뇌, 관절 등 장기별로 효과를 얻기를 기대하지만 우리 몸의 노화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속도로 진행되거든요. 눈 영양제로 복용하는 루테인과 지아잔틴은 노화와 연관된 황반변성을 예방하는 효과가 없다는 게 4,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6년간의 임상연구에서 확인됐어요."
-이번 연휴에 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추석에 식혜 많이 드실 텐데, 단순당을 음료로 마시는 게 정말 많이 해롭습니다. 마침 제로 식혜가 나왔으니 이것부터 바꿔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만 제로라고 안심하고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대체당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앓이를 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가 '저속노화 식사법'에서 소개한 아버지 생신 식탁에는 호두, 아몬드, 토마토, 와인, 로메인 상추로 만든 샐러드, 가자미 구이, 호박나물, 콩나물 무침, 두부 김치찌개와 귀리밥(귀리 함량 40%), 밀가루를 소량 입힌 해물파전이 오른다. 기름진 음식 없이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흔한 한식 상차림이다. 그가 꼽는 저속노화 식사법의 장점인 "교조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말이 대번에 이해가 된다. 이쯤 되면 스트레스 받는다고 식단 관리는 엄두도 안 냈던 사람도 살짝 용기가 생긴다. 큰 진입 장벽 없이, 대단한 결심 없이 당신도 할 수 있다. 명절 밥상에서 흰쌀밥을 치우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