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엑스(옛 트위터) 사용자(@DCDaxter_text)가 흥미로운 사진을 올렸다. 1929년 미국에서 출시된 고형 포도주스였다. 빨랫비누처럼 생긴 포도주스 농축물로, 물을 더해 주스를 만들 수 있는 제품이다. '아, 당시 미국인들은 포도주스를 즐겨 마셨군'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가운데, 제품 포장의 경고문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물에 녹인 뒤 20일간 발효시키면 안 됩니다.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고문을 일부러 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는 볼스테드법으로 미국 전역에 금주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14년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 전역에서 술의 제조, 수입, 유통, 판매가 금지되었다. 볼스테드법에는 허점도 있었으니 고형 포도주스는 이를 노린 제품이었다. 20일간 발효시키면 술이 된다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인 가정용 밀주 키트였다.
술은 마시지 않는 게 좋다. '하루 와인 한 잔 정도는 되려 건강에 좋다'는 설이 오래 돌았지만 요즘은 이야기가 다르다. '저속노화 식사법'으로 한창 화제인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는 '술은 전두엽을 도려내는 면도칼'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건강한 삶을 위한 금주를 권한다. 금주법 시행 당시 미국에서는 종교의 영향력이 컸다. 청교도들이 남북전쟁이 벌어진 19세기 중반부터 금주의 법적 강제를 시도했다.
금주법을 주도한 이들은 술이 만악의 근원이라 믿었다. 알코올 중독부터 가정 폭력, 술집에서 벌어지는 부패된 밀실 정치까지, 사회를 좀먹는 일들이 모두 술 탓이라 본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미국의 종교 공동체에서는 금주가 시행됐고, 아예 법을 통한 음주의 근절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종교만이 금주 강제의 원동력인 듯 보였지만 뜯어보면 여러모로 복잡한 사안이었다. 급속하게 발전하는 도시에 대해 교외 거주층은 소외감을 느꼈고, 맥주로 돈을 긁어 모은 독일계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도 심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금주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금주주의자(The Drys)들을 필두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민간에서는 기혼 여성 모임인 기독교부인교풍회가 금주의 바람몰이로 나섰고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반(反)주점 연합회가 앞장섰다.
부유한 가톨릭 교도들과 루터교의 독일계 미국인들이 금주에 반대하는 여론을 모으려고 시도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려 갔다. 결국 1919년 12월 18일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8조가 비준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알코올 농도 2.75도 이하의 주류는 제외할 것을 의회에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과는 금주파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원의 68%, 상원의 76%가 법 개정을 찬성했으며 48개주(州) 가운데 46개주에서 금주법이 실행되었다. 하지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말처럼 진공 상태의 금주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가톨릭의 영성체처럼 종교의식에 쓰는 술은 금지되지 않았다. 연방법으로는 개인의 술 소유와 음주가 허용되었지만, 더 엄격한 주법이 이마저도 완전히 금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20년 금주법이 발효되었지만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반대파들은 세수 축소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금주법 탓에 대공황 전후로 세수가 지나치게 줄어들어 경제가 위축되었다고 주장했다. '교외 대 도시'의 대결 구도도 따라 붙었다. 음주로 인한 가정 파괴 등을 내세우는 금주파의 주장이 도시인들을 무시했다는 논리였다.
무엇보다 금주법의 실효가 문제였다. 과연 법으로 일상의 음주를 금지시켜 금주주의자들이 갈망한 세상이 도래했을까. 금주법 발효 직후에는 술의 소비가 발본색원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발효 직전에 부유층은 가능한 한 최대량의 술을 사재기해 놓은 상태였다. 또한 술을 마시지 않고 못 배길 이들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한 고형 포도주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20일 동안 발효시키면 술이 된다'고 친절히 알려 주는데 안 살 재간이 없었다. 금주법 아래에서 오히려 음주인들의 창의력이 빛나기 시작했다. 산업용 알코올 소비를 막기 위해 쓴맛을 내거나 유독성 첨가물을 더하기까지 하는 특단의 조처를 하자, 밀주의 가정 양조가 기승을 부렸다.
가장 유명한 밀주는 조지아주를 위시한 남부의 '문샤인(Moonshine)'이었다. 옥수수 등의 곡물을 발효시킨 낮은 도수의 술을 25~40도까지 증류시킨 문샤인은 아직도 일부 남부의 가정에서 별미처럼 계승되고 있다. 드러내놓고 영업했던 술집은 불법 비밀 영업을 하는 '스픽이지(speakeasy)'로 탈바꿈했다. 불법 업장이니 '말을 조용히 하는 가게(speak-softly bar)'라는 표현에서 파생된 명칭이었다.
합법적 경로의 음주가 불가능해지자 술의 불법 제조와 유통이 오히려 기승을 부렸다. 당연히 범죄였다. '언터쳐블(1987)' 같은 영화에서 그렸듯 시카고주는 술의 불법 유통과 제조의 전진기지였다. 그 핵심에는 이탈리아계 폭력배 알 카포네(1899~1947)가 있었다. 카포네는 뉴욕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때부터 조직 폭력배 생활을 시작했다.
카포네는 이후 시카고로 이주해 불법으로 술을 만들어 파는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 조니 토리오의 보디가드로 자리를 잡는다. 토리오가 반대파 폭력배들에게 살해 당할 뻔 한 뒤 은퇴하면서 자리를 물려 받은 카포네는 '시카고 아웃핏'을 결성해 알코올 불법 제조와 유통 사업을 확장시킨다. 그는 심지어 '현대의 로빈 후드' 등으로 칭송까지 받으며 잠시나마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1929년 2월 14일 반대파 조직원들 7명을 백주 대낮에 살해한 '밸런타인데이 대학살'을 벌이며 카포네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결국 그를 법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경찰이 나섰고, 세금 포탈 등의 혐의로 카포네를 체포했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 1925년부터 1931년까지 7년간 시카고 아웃핏을 이끈 뒤의 일이었다.
가정 내 밀주 제조와 범죄조직의 불법 제조, 유통이 성행했다. 말하자면 목마른 이들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술을 찾아 마시는 판국이었다. 다들 불법 경로로 술을 마셨으니, 세수를 거둬들이지 못하는 정부만 손해를 보는 격이었다. 금주법 철폐를 위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해군 제독 윌리엄 H. 스테이튼(1861~1953)이 금주법 철폐에 앞장섰다. 스테이튼은 1918년 '금주법 개정을 반대하는 모임(AAPA)'을 결성한 상태였다. 1920년 볼스테드법이 제정되기 전에 미국 정부가 걷는 세금의 15%가 주류세에서 나왔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가운데 금주법만 철폐돼도 세수의 숨통이 트일 거라는 계산이 절로 섰다.
그리하여 1933년 3월 2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볼스테드법 개정안인 컬렌-해리슨법에 서명했다. 4도 수준의 맥주는 제조, 유통, 판매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루스벨트는 서명을 마치고 "맥주 마시기 좋은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으며, 법이 비준된 같은 해 4월 7일을 미국에서는 '맥주의 날'로 기리고 있다.
같은 해 12월 5일 수정 헌법 제21조가 비준되고 18조가 폐지되면서 금주법이 폐지되었다. 이것은 연방정부 수준의 절차였고, 주 정부 단위의 금주법 폐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미시시피주가 마지막으로 금주법을 폐지한 게 1966년이니 33년 뒤의 일이었다. 금주법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2014년 CNN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14%가 아직도 음주가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