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정원이 늘어나는 32개 의과대학에 2030년까지 5조 원을 투입한다. 비수도권 국립대 의대와 국립대병원을 거점으로 집중 투자해 지역·필수의료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의료계의 의대 증원 백지화 요구에 정부도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마당이라 투자가 계획대로 이뤄질지, 실효성이 있을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10일 발표한 ‘의학교육 여건 개선 투자 방안’에 따르면 32개 의대와 국립대병원에는 2030년까지 5년간 약 5조 원이 투입된다. 정부는 지난 3월 서울 소재 8개 의대를 제외한 32개 의대 정원을 5년간 2,000명씩(내년은 1,509명)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의대 증원에 따라 비수도권 국립대 의대 9곳 전임교원을 2027년까지 3년간 1,000명 충원한다. 대학별 교육 여건에 따라 내년 330명을 시작으로 2026년 400명, 2027년 270명 단계적으로 늘린다. 이를 위해 기금교수와 임상교수 등 병원 소속 계약직 교수들을 대학 소속 정규직 교수로 임용한다. 또 개원의 경력을 100% 연구실적으로 인정해 교수 채용 시 반영하는 ‘경력 경쟁 채용 제도’를 도입하고, 65세 이상 은퇴 교수(시니어 의사)를 명예교수로 채용한다. 기초의학 교수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라 기초의학 유관 인력 풀을 넓히는 등 자격 요건도 완화한다.
의대 시설도 확충한다. 비수도권 국립대 의대 중심으로 기존 시설을 개선(리모델링)하고, 건물 신축 등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공사는 2028년 완공 목표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설계·시공 일괄입찰 방식(턴키)을 통해 신속 지원한다. 사립대 의대는 직접 투자 대신 건물 신축 등에 필요한 자금을 저금리 융자하는 방식으로 지원한다. 의대 실험·실습 기자재도 내년부터 지원한다. 의대별 교육용 시신(카데바) 기증 구수 편차 완화를 위해 기증자·유족이 동의한 경우에 한해 기증 시신이 부족한 의대에 시신을 제공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도 추진한다.
지역 의료 강화를 위한 교육과정 혁신도 지원한다. 각 대학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교육혁신 계획을 수립하면 심사를 거쳐 재정을 투입한다. 의대생 지역 의료 캠프 운영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립대병원을 지역·필수의료 거점기관으로 육성하는 방안도 발표했다. 내년에 국립대병원 인프라 확충에 829억 원을 지원하고, 지역·필수의료 연구 역량 강화 등에 1,678억 원을 투자한다. 의대생과 전공의 교육을 위해 2028년까지 모든 국립대병원에 ‘임상교육훈련센터’를 마련한다. 국립대병원 관리 부처를 교육부에서 복지부로 이관해 국립대병원이 보건의료 전달체계의 중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역 의료 인력 양성 체계 확립 방안도 담겼다. 교육부는 비수도권 의대 26곳의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을 2024학년도(50%)에서 2025학년도(59.7%), 2026학년도(61.8%) 등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또 지역 의대를 졸업한 전공의들이 지역에서 수련받고 정착하도록 지역 수련병원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 내년부터 비수도권 전공의 배정 비중도 45%에서 50%로 상향한다. 전문의 대상 ‘계약형 필수의사제’도 시범 도입한다. 내년에 4개 지역에서 8개 진료과목의 전문의 96명을 선발해 월 400만 원씩 지역 근무수당을 지원한다.
사상 초유의 재정 투자에도 의대 현장은 의학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있을지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수업을 거부하는 의대생들이 2학기에도 학교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내년 집단 유급으로 신입생(4,695명)을 포함한 7,500명이 6년간 한꺼번에 수업을 들어야 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의대 증원 재조정 가능성이 부상하면서 재정 투자가 계획대로 이뤄질지 미지수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교육부는 “추후 의대 증원 규모가 변동하더라도 관계부처와 협의해 대응할 계획이다”라며 “5조 원 예산은 확보했기 때문에 연차별로 계획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 국립대 의대 교수는 “의정 갈등으로 의대 교육이 파행을 맞았는데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의대 증원을 강행하겠다는 의지 아니겠나”라며 “의대 증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재정 확보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불확실한 상황에선 정부 투자가 오히려 부담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한 국립대 의대 총장은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은 환영할 만하지만, 당장 의대생들이 복귀하지 않고 있고,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 얘기까지 나오면서 학사 운영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며 “정부 투자를 받아 필요한 교수들을 다 채용해도 될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의대 교수의 문호를 넓히는 방식의 채용 확대 정책도 논란이다. 박형근 제주대 의대 교수는 “정부는 생물학이나 화학 전공 박사학위 소유자도 기초의학 분야 교수로 채용하라고 하지만 의대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과목만 가르친다면 오히려 의학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근태 대한개원의협의회장은 “지역 의대 교수들이 힘들어서 그만두는 상황에 어떤 개원의가 보수나 처우가 열악한 교수직을 선뜻 가겠나”라고 반문했다. 다만 복지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시니어 의사 모집 결과 37개 기관에서 145명이 신청해 예상(80명)보다 많았다”며 “현장 수요가 있고 전문평가위원회에서 검증하기 때문에 의학교육 질 제고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