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연이 담긴 풍경화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곳곳에 비밀스러운 문화 코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풍경화 속엔 읽을 것이 넘쳐난다. 미술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줄 풍경화 명작을 골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풍차와 튤립을 빼놓을 수 없다. 우뚝 선 풍차와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튤립은 자동으로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에서 풍차가 곳곳에 세워지고 튤립이 벌판 한가득 피어난 시기는 17세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서양 역사상 최초로 사실적인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야코프 판 라위스달이 그린 '풍차가 있는 풍경'은 이 시기 네덜란드 풍경화를 대표한다. 널찍한 하늘을 배경으로 기념비처럼 솟아 오른 풍차가 인상적이다.
풍차는 지금은 관광용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생존을 위한 장치였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고, 국토의 절반 이상이 해발 고도가 1m도 안 되는 납작한 저지대이다. 이런 독특한 자연환경은 국가 이름에도 반영된다. 네덜란드라는 국가명은 ‘낮은 땅’을 뜻하는데, '낮다' 또는 '밑'이라는 의미의 ‘네더(Nether)’와 땅을 의미하는 ‘란드(Land)’의 합성어이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 부분이 거의 물에 잠겨 있기 때문에 24시간 물을 퍼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척박한 땅이다. 지금은 전동 터빈이 대신하겠지만 과거의 네덜란드인들은 수많은 풍차를 세워 젖은 땅을 마른 땅으로 바꿔 삶을 일궈 나갔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들이 만들었다"라는 유명한 네덜란드의 속담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간척을 하더라도 바닷물의 짠 기운으로 농사가 쉽지 않았다. 16세기에 네덜란드에 간 스페인 대사는 “이 나라의 절반은 물이고, 절반은 쓸모없는 땅이다. 농사를 지어도 100명 중 몇 명도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환경이 이토록 척박하니 이곳 사람들은 일찍이 상업으로 눈을 돌리면서 뭘 하든지 이윤을 따지게 된다.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튤립같이 고부가 상품을 재배한다든가, 값비싼 고급 치즈를 만들어 파는 데 집중해야 했다. 소위 ‘더치페이’는 이처럼 각박한 삶에서 나온 철저한 경제관념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풍차를 한없이 세워 늪지대를 살 만하게 만든 ‘낮은 땅’이 네덜란드였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풍차가 있는 풍경'을 다시 보면, 우뚝 선 풍차가 한층 더 위대하게 보인다. 풍차는 당시 네덜란드인이 물에 맞서는 생존 장치이자 자신들이 일궈낸 국토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림 속에는 인물 수십 명이 등장한다. 풍차에도, 언덕에도, 멀리 배에도 사람들이 대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풍차 뒤쪽에는 시청 같은 관공서도 보이고 종탑을 통해 교회의 존재도 암시한다. 네덜란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네덜란드인의 일상이 한가운데 풍차를 중심으로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에는 스페인과 벌인 치열한 독립전쟁을 통해 생겨난 국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그려진 지도 한 장을 보자. 이 지도는 라틴어로 ‘벨기에의 사자’라는 뜻에서 '레오 벨지쿠스(Leo Belgicus)'라고 불리는데,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영토를 사자로 표현했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다. 독일과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바다 건너에는 영국이 자리한다. 16세기부터 강력한 스페인 제국의 통치를 받은 네덜란드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80년간이나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이 지도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중간에 찾아온 휴전기에 그려진다. 사자의 상반신은 북부, 하반신은 남부 네덜란드를 가리키고 지도 양쪽에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도시가 나열되어 있다. 사자 앞에는 창과 방패를 내려두고 잠시 졸고 있는 기사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국토를 사자로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네덜란드인은 자신들을 유럽 강대국들에 맞서는 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도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또 다른 지도가 있다. 20세기 초에 우리 땅에서 그려진 ‘근역강산 맹호기상도’가 그것이다. 이 지도는 한반도 지형을 용맹한 호랑이로 위풍당당하게 그려냈는데,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면서 나온 지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지도는 땅을 정확히 기록해야 하지만, 땅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국토에 대한 의식까지 반영된다는 사실을 두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정확함을 미덕으로 삼아야 할 지도에도 땅에 대한 의식이 이처럼 강하게 반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성을 강조하는 실경(實景) 풍경화에도 당시 사람들의 국토와 자연에 대한 의식이 담길 수 있다는 주장이 무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풍경화 명작을 손꼽을 때 라위스달의 제자인 메인더르트 호베마가 그린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그림은 로테르담 아래 작은 어촌인 미델하르니스를 그린 것으로 특히 일자로 이루어진 지평선과 수직으로 배치된 가로수가 대로를 이뤄 공간감이 일품이다. 네덜란드 풍경화답게 하늘이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교회와 함께 배의 돛 머리가 보여 언덕 넘어 항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이 가로수 옆을 따라 난 수로도 주목할 만하다. 네덜란드는 지대가 낮아 배수가 중요했는데,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촘촘히 내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잘 정돈된 길, 수로, 가로수에서 당시 네덜란드가 얼마나 정성껏 국토를 가꿨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림 한복판에 자리한 인물 역시 인상적이다. 어깨에 길쭉한 총을 메고 사냥개와 다니는 것으로 보아 사냥길에 오른 사냥꾼으로 추정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을 치르며 용병을 동원했지만, 시민군으로 구성된 민병대도 핵심 전력이었다.
민병대가 잘 짜여 있어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비상시에는 전쟁터로 출전한 것이다. 그림 속 의기양양한 사냥꾼도 지금은 느긋하게 사냥길에 나서지만,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이 되었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은 자신들이 싸워서 얻은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려 했고, 당시 풍경화는 이 같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풍부한 호기심은 네덜란드의 집 안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내비친다. 얀 페르메이르의 '지리학자'를 살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일본의 전통 의복인 기모노를 입고 지도를 그리고 있다. 책상에는 페르시아산 카펫이 늘어져 있고, 배경에는 지구본이 자리한다. 델프트라는 작은 네덜란드 도시에서 그려진 그림이지만 다양한 진귀한 사물을 통해 세계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네덜란드인의 세계관이 잘 담겨 있다.
무엇보다 벽에는 네덜란드 지도가 걸려 있다. 세상에 대한 관심도 자기 나라 땅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당시 네덜란드 가정집에는 이 같은 지도와 함께 주변의 땅을 담은 사실적인 풍경화가 곧잘 걸려 있었다. 스페인 제국과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독립, 늪지대를 메꾸고 물길을 내서 힘들게 얻은 땅을 생각하면 네덜란드인에게 풍경화는 남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화 속에 이런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풍경화가 한결 더 신기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