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눈물겹게... 설렘도 설움도 물결 따라 흐른다

입력
2024.09.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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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동강 어라연과 서강 청령포

산을 넘지 못한 물은 골짜기로 에두른다. 강원 영월은 평창, 정선의 우람한 산줄기를 감싸며 흐르는 동강과 서강이 만나 본격적으로 한강(남한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영월읍내를 가운데 두고 동서 양쪽으로 흘러 이렇게 부르지만 동강과 서강의 정식 명칭은 조양강과 평창강이다. 굽이마다 아름다운 풍광과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걸어서만 볼 수 있는 비경, 동강 어라연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 원류는 골지천이란 명칭으로 흐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송천과 합류해 조양강이 된다. 조양강은 평창에서 흘러온 오대천과 합류해 정선 골짜기를 두루 적시고 영월 땅에 접어들며 동강으로 불린다. 구불구불하기가 뱀이 기어가는 모습 같아 사행천이다. 굽이마다 비경이지만 높은 산에 가로막혀 그 속살에 닿자면 웬만큼 발품을 팔아야 한다.

동강 최고 비경으로 꼽히는 어라연도 마찬가지다.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모습이 비단같이 눈부시다는 곳이다. 래프팅이 아니면 걸어야만 닿을 수 있다. 트레킹은 영월읍 동쪽 거운마을에서 시작된다. 거운분교(폐교)를 출발해 잣봉을 넘고, 돌아올 때는 강가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온다. 왕복 약 7㎞, 쉬엄쉬엄 4시간을 잡는다.



삼옥탐방안내소에서 잣봉과 동강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1㎞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마지막 마을 대마차까지는 임도 겸 시멘트 포장도로로 연결돼 있다. 삼거리에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으면 옴폭한 산중에 서너 채의 민가가 보인다. 길은 강에서 점점 멀어지고 솔바람 소리만 적막을 깬다. 길 양쪽으로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가는데 인적 없는 과수원에 클래식 선율이 감미롭다. 나무 지지대에 스피커를 달아 놓았다. 노동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고 산짐승도 쫓으려는 산골 농부의 이중 포석으로 보인다.

옥수수와 메밀이 심긴 작은 밭뙈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짧은 구간 평탄한 숲길이 끝나면 곧장 가파른 계단이다. 산등성이까지 약 500m는 숨 돌릴 구간 없는 오르막이다. 능선 부근에 닿으면 다시 완만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제야 주변의 일본잎갈나무 조림지며 아름드리 솔숲이 눈에 들어온다. 힘든 구간 맘 놓고 엉덩이 붙일 곳이 없었는데, 능선에 놓인 벤치가 반갑다.


멀리서 여울소리 들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까마득히 동강 물줄기가 어른거린다. 조금 더 가니 드디어 시야가 확 트인다. 따로 전망대라 표시해 놓지 않았지만 능선에서 동강 물줄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가파르게 쏟아지는 산자락 아래에 푸른색과 초록색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옥색 물줄기가 바위섬을 휘돌아 나간다. 산에서 전망 좋은 곳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바위 끝까지 가는 이들이 더러 있는 듯 출입금지 통제선이 둘러져 있다. 그 너머는 천길 낭떠러지다.

다시 솔숲으로 느긋하게 발길을 옮기면 곧 정상이다. 올라온 수고에 비하면 다소 허탈하다. 전망이랄 게 없고 잣봉 정상(537m)을 알리는 표석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하기야 이 길의 주인공은 산이 아니라 강이 아닌가.



정상에서 어라연으로 내려가는 길은 오를 때보다 훨씬 가파르다. 폭이 좁고 돌부리까지 거칠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중턱쯤 내려왔을까, 앞서간 행인이 없었는데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강물에 뗏목이 여러 대 떠 있다.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긴장하며 땀을 쏟은 뒤라 물결 따라 느긋하게 내려가는 이들이 한없이 부럽다. 그 옛날 뗏목꾼들이 소금땀을 흘렸을 강줄기에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물빛처럼 청량하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 ‘어라연 전망대’ 이정표가 보인다. 약 100m 이동하면 다소 평평한 바위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크게 휘어진 물줄기와 강 한가운데 바위섬이 내려다보인다. 물빛깔에 초록이 뚝뚝 듣는다. 소나무가 뿌리내린 바위는 화산탄이 응고된 것처럼 신비롭다. 깎아지른 절벽(단애)과 모래사장, 자갈 퇴적물이 빚은 동강은 강원고생대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전망대에서 짧은 구간 가파른 내리막을 거치면 돌아오는 길은 강줄기와 나란히 이어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절반가량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거친 바위투성이라 걷기가 쉽지만은 않다. 잔잔해 보이는 물길도 사납기는 마찬가지여서 ‘떼꾼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위험구간이다. '우리 집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가셨나'라는 정선아리랑 구절이 있다. 황새여울은 평창 미탄면, 된꼬까리는 이곳 영월 거운리 여울이다.

돌길이 끝나고 드디어 순탄한 강변길이 시작되는 곳에 ‘전산옥’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위험구간을 무사히 통과한 떼꾼들이 만지나루에 배를 묶고, 막걸리 한 사발에 긴장을 풀며 쉬어가던 곳이다. 뗏목도 주막도 사라졌는데 한결 넓어진 길에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몇몇 민가가 여전히 은둔하듯 어라연 모퉁이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삼거리까지 돌아오는 길은 흐르는 강물처럼 편안하다. 어라연 탐방로에는 매점이나 약수터가 없다. 출발하기 전 생수와 간식을 꼭 챙겨야 한다.



푸르러서 서러운 육지 속 섬, 청령포

청령포는 영월읍을 코앞에 두고 크게 휘어 도는 서강 물줄기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면이 강이고, 한쪽은 높은 산줄기와 이어져 육지 속 섬이자 배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담장 없는 감옥이다. 단종은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됐고 청령포에 갇혔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해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300여 년이 지난 1763년 영조는 이곳에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쓴 비석을 세우고, 뒷면에 지명을 청령포(淸泠浦)라 새겼다.


청령포에 가려면 단종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배를 타야 한다. 작은 유람선이 수시로 여행객을 실어 나른다. 잔잔한 물살을 가른 배는 서강의 정취를 느낄 새도 없이 모래와 자갈이 섞인 청령포에 닿는다.

폐위당한 단종이 서러움을 견뎠을 청령포에는 수백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가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솔숲으로 난 덱 산책로를 따라가면 복원한 단종 처소가 나타난다. 소나무 몇 그루가 어린 임금을 위로하듯 담장 안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마당 가운데 비각 안에 영조가 내린 단묘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숭정황제 무진년(1628) 기원후, 세 번째 계미년 9월에 눈물을 닦으며 삼가 써서, 원주감영에게 명하여 비를 세우다”라고 적었다. 단종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별개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조선의 처지가 조금은 곤궁하다.



인근에는 어명으로 민간인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도 있다. 역시 영조가 세운 비석으로 동서 300척(약 91m), 남북 490척(148.5m) 범위를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했다. 모래와 자갈이 실려와 해마다 확장되는 땅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된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청령포 솔숲에서 가장 돋보이는 나무는 수령 63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아래서부터 두 갈래로 힘차게 뻗은 기세가 마치 청령포의 주인인 듯하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둘로 갈라진 나무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의 처량한 모습과 울음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觀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배를 타고 되돌아 나오면 주차장 모퉁이에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은이를 단종 유배길에 호송 책임을 맡은 금부도사 왕방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왕방연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왕이 강물에 흐르다(王邦衍)’라는 뜻의 시조 제목이라 주장한다. 바로 옆에는 단종과 부인 정순왕후가 손을 맞잡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순왕후도 단종 폐위와 함께 국모에서 노비로 강등되는 비운을 겪었다. 눈이 부시게 풋풋해야 할 청춘 남녀의 사랑이 애틋하고 서럽게 느껴진다.



영월=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