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의대생 집단행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의 실명과 신상정보를 악의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블랙리스트'에 응급실에서 일하는 전공의·군의관 명단이 대거 추가됐다. 이런 명단은 대정부 집단행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진료 현장에 남은 동료들을 조롱하고 압박할 목적으로 작성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응급실 전담의 부족으로 이른바 '뺑뺑이 사망'이 잇따르는 위기 상황에도 의사 윤리를 저버린 행태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 행위"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9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해당 블랙리스트는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기록소) 형태의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돼 있다. '감사한 의사'라는 반어적 제목이 달린 이 사이트는 일반인도 주소를 알면 열람할 수 있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매주 토요일에 업데이트가 되는데, 지난 7일에는 '응급실 부역'이라는 제목의 항목이 추가됐다. 빅5 병원(5대 상급종합병원)을 포함한 187개 수련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는 전문의·전공의 인원 집계치와 함께 일부 병원 근무자의 실명을 'OOO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비꼬는 표현과 함께 공개한 것이다. 명단 맨 위에는 '군 복무 와중에도 응급의료를 지켜주시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며 응급실에 파견된 군의관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글쓴이는 "추석을 맞이해 응급실 (근무자) 명단을 만들었다" "리스트의 목적은 박제도 있지만 행동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며 응급실 근무 의사들을 비난할 의도로 명단을 작성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블랙리스트는 지난 2월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에 반발해 전공의·의대생이 수련병원과 강의실을 집단 이탈한 직후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실명 공개를 넘어 개인 연락처, 출신 학교, 연인 관계 등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신상 정보도 개시된다. '불륜이 의심된다'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 '래디컬 페미니스트' 등 악의적인 평가도 서슴지 않는다. 명단을 돌려보는 의사들 사이에서 해당 사이트는 '감귤사랑' '감귤'이라는 은어로 불리는데, 감귤사랑을 줄이면 '감사'가 된다는 일종의 말장난이다.
명단은 갈수록 확장되고 있다. 처음에는 수련병원 집단사직에 불참했거나 복귀한 전공의를 겨냥했다가 이후 하반기 수련생 모집에 지원하거나 촉탁의 계약을 맺고 수련병원에 돌아간 사직 전공의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 영원히 남는다"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사직을 종용하는 글도 게시된다. 하반기 모집에 합격했던 전공의가 임용을 포기하자 "회개했다"며 신상 정보를 삭제해주기도 했다.
이런 마구잡이식 폭로와 비난 탓에 상당수 전공의와 의대생이 진료·교육 현장 복귀를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대생 A씨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만 선배들이 족보(시험 기출문제) 자료를 주지 않고 나중에 인기과 지원도 못 하게 막겠다고 한다"며 "의대에선 선배들을 통해 공유되는 족보가 절대적인 학습자료로 이게 없으면 10배 이상 공부량이 늘어난다"고 한탄했다. 그는 "응급실 파행을 막으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분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게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라며 "한때 사직·휴학의 자유를 외쳤던 저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실명을 악의적으로 공개하는 건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이들을 위축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 행위"라며 "일부 군의관은 이로 인해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부는 이미 경찰에 해당 사이트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으며, 이번에 업데이트된 내용 가운데 문제가 되는 부분도 경찰에 전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