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대왕', '비빔 1인자', '세계 비빔 총책임자'.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뜨거운 유비빔(60)씨를 부르는 말이다. 유씨는 지난 17일 공개된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등장해 범상치 않은 행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방송에서 뒤집은 심벌즈 위에 비빔밥 재료를 올린 뒤 '비빔 노래'(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 선율에 "비빔" 가사를 붙인 자작곡)를 부르며 지휘했다. 심사를 맡은 백종원은 리듬에 맞춰 밥을 쓱쓱 비빈 뒤 시식했다. 결과는 5초 만에 탈락.
'광속 하차'에도 계속 화제가 되는 건 그의 비빔에 남다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전북 전주시에 위치한 유씨의 음식점에서 그를 만나 오랜 비빔 여정을 들어봤다.
유씨의 가게 한편엔 그가 비빔 관련 자료를 수집·연구하는 '비빔 연구소'가 마련돼 있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엔 수천 권의 연구 공책이 빼곡하게 쌓여있었다. '비빔대왕은 콘셉트 아니냐'는 일부 시청자들의 의심에 그는 "전 20년 넘게 비빔만 팠다"고 답한다.
항상 그의 꿈이 '비빔대왕'이었던 건 아니다. 학창 시절엔 드럼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밴드를 시작으로 20대 중반까진 드럼 연주자로 활동했다.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했지만 뒤처졌다. 좌절한 유씨는 음악을 그만두고 포장마차, 과일 장사 등 20가지 넘는 직업을 전전했다.
그런 유씨를 일으켜 세운 건 스승인 고(故) 김대환 연주가였다. "다른 사람 따라 하지 말고 너만의 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스승의 조언에 떠올린 게 '비빔'이었다. "어느 날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데 현과 활을 비벼야만 아름다운 소리가 나더라고요. 사람도 음과 양이 합쳐서 나는 거고요. 세상에 안 비벼지는 분야가 없어요. 이거다! 싶었죠."
비빔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2003년 비빔밥 가게를 차렸다. K소리와 K푸드를 비벼 알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비빔소리'라고 이름 지었다. 손맛이 좋은 아내가 주방장을 맡고 유씨는 주방 보조와 공연을 맡았다. 유씨는 "예능에서 최초로 비빔 노래를 부른 건 아니고 전부터 손님들 앞에서 비슷한 곡들을 연주해 왔다"며 웃었다.
그는 2007년 이름도 '유인섭'에서 '유비빔'으로 개명했다. 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엔 운이 달라지길 바라며 아들 이름도 '융합'으로 개명시켰다. "아들이 '융합'이 되고 나서 운수 대통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올해 환갑을 맞아, 아내 김연수(57)씨에게도 "환갑 선물로 '김비빔'으로의 개명은 안 되겠냐"고 부탁했지만 실패했다.
비빔 연구에 몰두하면서 한글과 여러 외국어를 합친 '비빔문자'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한글-영어를 합친 비빔문자는 '비'를 표현할 때 비읍 대신 영어 알파벳 'b'를 넣어 'bㅣ'로 쓰는 식이다. 유씨는 "문자를 비비면 그 문자로 표현하는 모든 것을 비빌 수 있다. 진정한 비빔 세계화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비빔문자 전용 타자기로는 특허도 받았다. 전통악기 징에 '비빔' 글자를 새겨 만든 세계지도 등 비빔을 활용한 300여 가지 작품도 제작했다.
중국이 돌솥비빔밥 조리기술을 성(省)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는 소식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백제 때부터 돌솥을 사용했다는 역사적 근거에 더해 중국은 한국만큼 온 나라가 '비벼진 적 없다'는 독특한 논리를 세웠다. "우리는 IMF 같은 위기에도, 2002년 월드컵 같은 축제에도 한마음으로 함께했잖아요. 중국은 우리만큼 비빔 미학을 실현시키지 못했어요."
유씨가 '비빔 전문가'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지난해엔 롯데리아의 전주비빔라이스버거 광고 모델로도 기용돼 "비비셔야 하옵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뽑은 최고의 순간은 '흑백요리사'에 출연했을 때다. '세계를 비비겠다'는 평생의 꿈이 실현됐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가 준비한 음식을 백종원 선생님이 음악에 맞춰 비비고 먹는 영상이 전 세계에 나갔잖아요. 20년 가까이 비웃음당한 꿈이 이뤄지니까 한이 풀렸어요."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그만 비벼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유씨는 "힘닿는 데까지 계속 비벼야 할 때"라고 했다. "요즘 종교, 지역감정, 정치 성향 이런 걸로 많이 싸우잖아요. 그럴 때 필요한 게 비빔이에요. 치우치지 않고 접점을 찾아 화합하는 길. 비빔하세요 비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