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은 한국 올림픽의 최고 효자 종목이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양궁에 5개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했다. 특히 여자 양궁은 시대가 바뀌고, 멤버가 바뀌어도 한결같이 세계 최강 자리를 지켰다. 단체전이 도입된 1988 서울 올림픽 이래 36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10연패 위업을 이뤘다.
1984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서향순을 시작으로 파리 올림픽 임시현까지 10명의 ‘신궁’이 탄생한 가운데 꾸준히 팬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건 8대 신궁 장혜진이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2관왕을 차지하며 ‘짱콩’ 열풍을 일으켰다. 짱콩은 키가 작은 땅콩 중에 최고가 되라는 의미를 담은 장혜진의 별명이다. 키는 158㎝로 활보다 조금 크지만 존재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장으로 단체전 8연패를 이룬 다음 개인전에서 2관왕을 완성했다.
2020 도쿄 올림픽과 2024 파리 올림픽은 선수가 아닌 방송 해설위원으로 9연패, 10연패의 감동적인 순간을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2022년 은퇴 후 결혼과 출산을 하고 지금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지역본부 도심정비계획팀 차장으로 ‘K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장혜진을 지난달 28일 서울 논현동 근무지에서 만났다.
장혜진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활을 잡았다. 같은 반 친구가 ‘양궁장에 놀러가자’는 말에 양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따라갔다. 장혜진은 “선배 언니들이 자기 키보다 큰 활을 가지고 무표정으로 쏘는 모습이 엄청 멋있어 보였다”며 “그런데 학교 코치님이 ‘맛있는 간식도 먹을 수 있다’며 양궁을 권유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장혜진은 부모님에게 흔쾌히 허락을 받을 줄 알았지만 반대에 부딪쳤다. 부모님은 “운동이 쉽지 않다. 시작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겠냐”면서 반대했고, 장혜진은 “끝까지 해보겠다”고 이틀에 걸쳐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양궁이 재미 있어서 시작했지만 성장은 더뎠다. 중학교 때까지 전국대회를 나가보지 못했다. 장혜진은 “재능이라고는 없었다”며 “남들보다 체격 조건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엄청 왜소하고 작았다. 단지 양궁장에 가서 간식 먹고, 동료들과 코치님이랑 지내는 시간이 재미 있어서 양궁장을 들락날락하면서 (훈련을) 했었다”고 설명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양궁 선수한테 치명적인 ‘클리커병’이 찾아와 고생했다. 이 병은 자신감 등이 부족해 활 시위를 놓지 못하는 일종의 불안 증세다. 장혜진은 “중학교에 가니까 거리도 멀어지고 좀 더 힘들어서 양궁 선수에게 제일 불치병인 클리커병이 왔다”며 “무서워서 그런 병까지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 부모님께 ‘끝까지 해보겠다’는 말을 해놓은 게 있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중학교 졸업 후 양궁부가 창단된 대구체육고로 진학한 장혜진은 1학년 때 합숙과 훈련 방식에 힘들어해 잠시 방황도 했으나 부모님 생각을 하며 버텼다. 장혜진은 “효녀 심성이 있어서 정신을 번쩍 차렸다”며 웃은 뒤 “기존에 사용하던 활 대신 다른 브랜드의 활을 쓰면서 기록이 확 눈에 띄게 올랐다. 이후 처음 메달 맛도 보게 됐고, 양궁에 더 빠지게 됐다”고 밝혔다.
대학 4학년에 늦게 태극마크를 단 장혜진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2년은 두고두고 아쉬운 해다. 그해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후보 4인에 이름을 올렸지만 막판에 최현주에게 밀려 출전이 불발됐다. 당시 국가대표 점수가 높은 기보배와 이성진이 일찍 1, 2위를 확정했고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장혜진과 최현주가 각축을 벌였다. 그리고 터키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장혜진이 16강에서 탈락한 반면 최현주는 8강까지 올라 간발의 차로 최현주가 막차를 탔다.
장혜진은 “런던 올림픽 선발전 방식은 국내 선발전을 통해 4명을 뽑은 뒤 그 4명이 국제대회를 뛰면서 성적 순으로 배점을 합산해 최종 3명을 선발했다”며 "국내 선발전에서는 내가 3등을 했지만 국제대회 경험이 많이 없다 보니 성적이 너무 부진해 종합 0.5점 차로 탈락했다. 양궁은 워낙 공정하고 투명한 선발 시스템으로 유명하니까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아직은 내 실력이 부족하니 더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숱한 시련은 장혜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열린 리우 프레올림픽 때도 4위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출전 선수들과 동행해 몰래 훈련하며 올림픽 꿈을 키웠다. 그리고 2016년 리우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 강채영과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여 1점 차로 막차를 탔다. 마침내 올림픽행 꿈을 이뤘지만 장혜진은 2012 런던 올림픽 2관왕 기보배와 최미선에게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위축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자신감이 가득 했다.
장혜진은 “런던 올림픽 탈락 후 국제대회 경험도 많이 쌓았고, 스스로 4년 전보다 성장했다고 느꼈다”며 “리우 올림픽 선발 과정도 약간 기적처럼 이뤄져 모든 기운이 나한테 오는 것 같았다. 리우에 가서도 활 쏘는 느낌이나 컨디션이 너무 좋아 자신 있는 슈팅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주장으로 단체전 1번 주자를 맡아 8연패에 큰 힘을 보탰고, 이후 개인전까지 휩쓸었다. 당시 29세의 나이로 늦게 꽃을 피웠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피었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개인전보다 단체전에 큰 부담을 느낀다고 말한다. 1988 서울 대회부터 이어진 연속 우승 기록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자신의 실수로 동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다. 리우 대회에서 8연패를 장식한 장혜진은 “개인전은 내 것만 잘하면 되니까 상관없는데 단체전은 내가 실수하면 안 되고 같이 힘을 모아서 해야 되니까 부담이 더 크다. 또 연속 우승 기록을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감도 심했다”고 밝혔다.
파리 올림픽에서는 상징적인 10연패가 걸려 있어 후배들이 얼마나 부담을 안고 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현장에서 해설을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장혜진은 “1988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는데, 우승을 이어나가는 입장에서 만약 내 실수로 끊어진다면 역적이 되는 느낌일 것”이라며 “멘털이 약한 경우라면 양궁장에 정말 못 나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10연패를 달성한 후배들이 더욱 대견하게 느껴져 직접 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리우 올림픽 2관왕 장혜진과 파리 올림픽 3관왕 임시현 중 누가 더 대단한가라고 묻는 짓궂은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임시현을 꼽았다. 장혜진은 “난 저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며 미소 지은 뒤 “진짜 후배들이지만 엄청 존경스럽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활을 진짜 잘 쏜다”고 칭찬했다.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환경에서 훈련하는 후배들이 부럽기도 하면서, 혼성 단체전이 조금 더 일찍 리우 올림픽에 도입됐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내비쳤다. 장혜진은 “리우 때 컨디션이라면 혼성전도 우승해 최초의 3관왕이 되지 않았을까요”라며 활짝 웃었다.
한국 양궁은 공정한 선발 시스템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 때문에 올림픽보다 국내 선발전이 ‘바늘구멍’이다. 성공보다 실패를 겪을 꿈나무들이 훨씬 더 많기에 먼저 어려운 길을 걸은 장혜진의 조언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장혜진은 국가대표 꿈을 키우는 후배들을 향해 “계속 힘들다, 힘들다 하면 사람이 계속 부정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고 축 처져 하기 싫게 된다”며 “그럴 때마다 일부러 더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꾸려는 생각을 했고,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목표에 가까워져 있는 걸 보게 됐다. 후배들도 지금 힘든 순간들이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즐겁게 그냥 훈련을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건넸다.
직장인으로서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갖고 일한다. 장혜진은 “양궁만 해서 우물 안 개구리였는데, LH에서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며 “은퇴 이후에 ‘장혜진처럼 저런 삶도 꿈꿀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후배들에게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먼저 같은 길을 걸었던 선배들이 이뤄낸 업적에 내가 흠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