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두를까 말까' 만년 후보 선수, 9회 말 풀 카운트 선택은

입력
2024.09.06 10:00
연극 '펜스 너머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해'
꿈과 재능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 드라마
서울 영등포아트홀에서 8일까지 공연

야구 경기 중 9회 말 '풀 카운트(3볼 2스트라이크)'. 상대팀에 1 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 타석에 선 권준호는 고민한다. '투수가 던지는 다음 공을 쳐야 할까.' 펜스 너머 응원석에서 친구들은 소리친다. "배트를 휘둘러 준호야!" 반면 감독은 신신당부했다. "무조건 참아!" 스트라이크를 당해 아웃될 위험을 감수하느니 볼넷을 유도해 진루하자는 것. 고민하는 찰나 상대 투수가 공을 던졌다. "원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되어버린" 준호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지난달 23일 서울 영등포아트홀에서 개막한 극단 불의전차의 연극 '펜스 너머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해'는 고교 시절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을 담은 청춘 드라마다. 극은 그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지만, 만년 후보 선수로 머무는 태영고 학생 권준호(유희제·도예준 분)와 그의 친구 박성호(김바다·김동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밴드 데이식스(DAY6)의 노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가사처럼 '아름다운 청춘의 한 장'이 펼쳐진다.

고3 마지막 여름방학 태영고는 전국대회에 출전한다. 야구팀 에이스 투수인 성호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결원이 생기면서 준호는 얼떨결에 라인업에 들게 된다. '재능 있는 투수'가 되고 싶었지만 타석에서 '가만히 서 있는' 지명 타자 역할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준호는 생각한다. '내가 이번 경기에 안타를 치면,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야구선수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던 그런 권준호로 남겨줄 수 있겠지?' 꿈과 재능 사이에서 방황하는 10대의 군상이다.

청소년극답게 작품은 공연 시간 내내 밝고 유쾌하게 흘러간다. 시시콜콜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은 도저히 가라앉는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다. 고교 진학 후 방학 때마다 투구 연습에 매진했던 준호를 감독은 너무나 손쉽게 "노력하지 않는 아이"로 규정한다. 투수 대신 타자라도 하기 위해 야구 배팅 연습장에서 300만 원을 썼던 준호는 헷갈린다. "정말 난 게을렀던 걸까?"

경기가 끝나고 성호는 "정말로 잘했다"고 준호를 격려한다. 심판조차 "정말로 멋있었다"고 인정한다. 극 배경이 고교 야구부인 만큼 자연스레 지난달 23일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 우승한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열악한 환경에서 신화를 만든 선수들에게 친구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너희들이 최고"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작품에는 일본의 유명한 야구 만화 'H2'가 극중 소재로 등장한다. 이 만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델리스파이스의 '고백(2003)'이 극의 감수성을 채운다. 청소년극이지만 30·40대가 즐기기에도 무리 없는 이유다.

연출가 변영진이 극작까지 맡은 작품은 2020년 초연 이후 지난해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에 선정됐다. 작품성이 검증된 만큼 영등포아트홀이 이례적으로 16회에 걸친 장기 공연으로 기획했다. 공연은 오는 8일까지.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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